"저는 단지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도 않고 시킨 대로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히틀러의 충직한 부하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 그의 주 업무는 유대인을 기차에 태워 가스실이 설치된 수용소에 보내는 일이었다. 그의 가장 큰 실적은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제작한 것. 보다 효율적인 학살을 위해 만들어진 열차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법정에 서게 된 아이히만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은 독일 제국의 선량한 시민이고, 국가가 법에 따라 내린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죄의 짐을 덜어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이 악마나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로 생각했으나 실제 법정에 선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기 때문이다. 특별한 범행 동기가 있지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검진한 정신과 의사들도 그가 매우 정상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그렇다. 그는 단지 일개 공무원이었고, 시키는 일을 해낸 것이 전부였다. 다만 무조건적인 복종을 했을 뿐이다. 복종해서 가스 열차를 만들고, 복종해서 수백만 명을 학살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이론을 떠올리게 된다. '악의 평범성'이란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악은 특별한 자만이 저지르지 않고 의외로 동기 없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평범하고 진부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평범한 악은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남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함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고, 결국에는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악이 된다는 내용이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않았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는데 죄의식 없이 악행을 범했다.'악의 평범성'은 실험으로도 입증됐다. 순종적인 사람들이 나쁜 짓도 잘 순종해서 따라 한다는 것이다. 착하게만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종적인 사람들도, 주변이 악한 사람들로 가득하면 착하게 살기 어려웠다. 실제로 권위 있는 사람이 악한 일을 지시했을 때, 늘 말을 잘 들었던 순종적인 사람들은 악을 따랐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도 이 같은 경우의 사례는 널려있다. 학교, 직장, 가정, 이웃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공감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입장만 늘어놓는 자들, 명령에 무조건 따르라며 강요하는 자들,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은 자들, 양심을 저버리고 무조건 순종하는 자들, 나쁜 일을 보고 방치하는 자들 등은 언제나 주변에 있다. 그만큼 인간의 악이라는 것은 가까운 곳에 있고 평범한 가면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불순종이 선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선도, 악도 아닌 선택이다. 진정 바르고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하 관계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순종을 요구하기보다 설득으로 다가가야 한다. 남을 업신여기기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공감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경국 문화체육부 차장대우
- [무등의시각] 흔들리는 대통령, 흔들리는 지역현안 호남은 또 정치 클리쉐에 당한걸까.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만들겠다던 윤석열 정부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윤석열표 광주 약속은 물론 균형발전 약속 어느 것 하나 전진에 방향타가 맞춰지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12.72%'. 광주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얻은 보수진영 대통령 탄생이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만들어 주었건만 불과 반년 만에 '그럼 그렇지' 볼멘소리가 심심찮게 터져 나오고 있다.얼마 전 윤석열 정부 첫 예산안이 공개됐다. 긴축에 초점을 맞춘 재정 기조를 감안하더라도 실망이라는 평가가 적잖다. 특히 지역화폐, 임대주택, 쌀값 등 소득부족과 물가 상승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는 서민을 고려한 조치 측면에서 아쉬운 대목이 많다. 야당이 '정부의 나라빚 걱정을 오롯이 시민들에게 떠넘긴 약자 실종 불공정 예산', '참으로 비정한 예산'이라는 쓴소리를 내뱉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물론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광주는 2년 연속 3조원 돌파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국비를 확보하는 성과를 냈다. 굵직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 대거 포함된 덕이다.그렇다면 대통령의, 집권 여당의 호남 챙기기 의중이 반영된 결과일까? 답은 '아니오'로 기운다.인공지능, 반도체 등 신 경제 미래먹거리 분야에서 타 지역에서는 구현해내지 못한 무형의 아이디어를 대거 유형의 사업으로 전환했던 광주의 작전이 먹혀 들어갔다는 평가가 더 많다.윤석열 대통령의, 국민의힘 차원의 지역 현안 사업 국비 반영 노력이 아닌 광주시의 '개인기'가 더해진 결과일 뿐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윤석열 대통령이 선거 기간 우리 지역에 약속했던 공약 이행도 낙제점이다.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반도체나 인공지능, 미래차 육성 분야는 일부 포함됐지만, 공약 사업인 달빛고속철도와 서남권원자력의료원 등은 누락됐다. 대통령의 약속이 관계부처의 반대(구체적인 정부 기본계획이 수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도 포함되지만)에 발목이 잡혀버린 우스운 상황만 연출됐다.국민의힘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광주를 찾아 개최했던 예산협의회에서 약속한 사업도 삐걱거리고 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지난 7월 전남대학교병원 신규 건립과 관련해 "예산 당국에 부탁을 해서 1차적으로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으로 집어넣었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당 차원에서 기획재정부와 전남대병원 새병원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협의했다고 공식화 한 것이다.하지만 결과는 대상 자격 미달. 용도변경을 완료하지 않은 병원 측의 미숙한 행정 때문이라고만 몰아세우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잖다. 앞서 전북, 경북 등도 도시관리계획 변경 전 예타 대상 사업으로 선정된 경우가 있었고, 이번 예타 대상 포함 사업 가운데서도 유사 사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균형발전에 역행하는 수도권 중심 정책도 '말뿐인 지방시대'로 가고 있다.반도체 학과 증원과 수도권 공장 증설 규제 완화 등과 같은 수도권 중심 정책 강화, 국정 과제에 포함된 기업의 지방이전 공약과 투자 촉진도 반대로 가고 있다.대통령의 지지율이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점도 '尹표' 지역혁안 정책 표류 우려감을 키운다.취임 불가 80일 만에 20%대까지 추락했던 대통령의 지지율은 현재까지도 30%대 초반을 겨우 회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지율 지진에서 버팀목이 되어 줄 여당마저 불협화음, 갈라치기 등으로 내홍 중인데다 여사를 비롯한 대통령 주변 논란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국정을 온전히 주도 할 윤 대통령의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을 지, 언제고 볼 수 는 있을런지 의문 부호가 달린다.겨우 5년이다. 대통령의 정책 집행을 위한 씨앗을 심을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초석이 제대로 쌓이지 못하면 '지역맞춤형 성과내기'도 난망에 그칠 것이다.윤석열 대통령의 지방시대가 허울뿐인 약속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본다. 주현정 무등일보 취재1본부 정치행정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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