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화의 창

무등일보·아시아문화원 공동기획 아시아문화의 창 <6>영화적 환상, 환상적 영화

입력 2018.07.09. 00:00
새 형식에 대한 놀라움이 관객의 반응을 만든다
영화적 환상을 통해 울고 웃고
감동하는 것은 허깨비를 보는
순간과 같다. 아방가르드 영화는
이와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며
관객이 영화에 몰입되지 않고
영화가 기술적 트릭에 의해
유현목 '손'(1967)

소위 영화의 역사를 소개할 때 최초의 영화로 1895년 뤼미에르의 형제가 만든 <기차의 도착>이 등장한다. 그 이전에도 영화로 간주되는 영상들이 있었지만 극장과 관객, 그리고 스크린과 영사기라는 시네마토그라프 형식의 <기차의 도착>은 현재의 극장 시스템에서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최초의 영화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기차의 도착>은 그야말로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기차가 도착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뛰쳐나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기서 관객들이 왜 도망쳤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업영화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극영화는 편집을 통해 장시간 동안의 사건이나 일대기 혹은 한시대의 이야기를 실시간의 경험처럼 느끼게끔 만들어낸다. 이러한 장치를 영화에서는 '환영'이란 용어로 표현하는데, 몰입도가 높은 상업영화일수록 환영적 효과가 뛰어나며 관객은 실제 공간이 아닌 스크린 속으로 몰입하면서 영화적 환상을 느끼게 된다. 반면, <기차의 도착>은 편집이 전혀 없는 하나의 시퀀스, 즉 환영성을 부각시키는 장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학자 톰 거닝은, 기차가 실제처럼 다가오는 공포감이 아닌 매체가 가지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놀라움이 관객의 반응을 만들어냈음을 지적한다. 환영의 유사어로는 '허깨비'가 있다. 영화적 환상을 통해 울고 웃고 감동하는 것은 허깨비를 보는 순간과 같다. 아방가르드 영화는 이와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며 관객이 영화에 몰입되지 않고 영화가 기술적 트릭에 의해 무의식을 조작하고 있음을 일깨워주고자 한다. 1920년대 전후의 유럽에서 시작한 아방가르드 운동은 이미 조류가 아닌 장르로 발전되었고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시작된 아방가르드 영화 역시 현재는 실험영화라는 용어로 제작되고 있다.

#그림1중앙#

한국의 실험영화는 1960년대 초부터 제작되었다. <오발탄>, <임꺽정>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현목은 1964년 '씨네 포엠'이라는 동인회를 창립하여 미국, 프랑스 등의 실험영화를 상영하고 제작 워크숍도 진행하였다. '씨네 포엠'의 첫 작품인 <손>은 몬트리올 국제박람회의 실험영화 상영회에 출품하였으며 이후 <선>이라는 작품도 발표하였다. 60년대 초 미국에 체류 중이던 유현목은 당시 미국의 실험영화 전성기를 목격하고 주류영화였던 극영화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들을 선보이고자 했다. 국내에 들어와 제작한 <춘몽(1965)>은 스토리가 없이 상징적 이미지들로 전개한 실험영화라고 발표했으나 여성의 나체 뒷모습이 6초 등장한 것으로 국내 영화 최초 음화 제조죄 판결을 받았다. 이야기(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서술해나가는 극영화가 영화의 기본이며 영화줄거리의 탄탄함이 관객의 호응을 얻는다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인식은 당시의 유현목이 감독으로서 만들어보고 싶었던 환상적인 영화와는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60-70년대 국내 상황에서 실험영화를 만날 수 있는 환경은 미국공보원과 독일문화원, 프랑스문화원의 상영회와 대학의 영화동아리였다. 이 중 이화여대 영화동아리인 '카이두 클럽'은 실험영화 제작과 발표를 목표로 구성된 첫 단체다. 한옥희, 김점선 등으로 구성된 '카이두 클럽'의 멤버들은 신세계 백화점에서 실험영화 페스티벌(1974년)을 개최하고, 한국 주류 영화계에서 배제된 여성의 위치와 여성 영화인들의 현실참여의 대안을 실험영화에서 찾고자 했다. 영화의 몰입은 주체와 스크린 안의 대상(혹은 상황)이 동일시될 때 극대화된다. 절세미녀에다 현모양처가 아니면 요부로서 등장하는 여성은 남성관객의 환상만 충족될 뿐이다. '카이두 클럽'이 명동에서 행한 나체 퍼포먼스, 영화 속의 단절적 이미지 등은 뿌리박힌 영화관습을 깨트림과 동시에 주류에 대한 반기를 통해 표현의 자율성을 보여준다.

흔히들 실험영화와 독립영화, 그리고 예술영화의 구분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실험영화'는 미학형식적 측면에서 정의된다. 주류영화에서 추구하는 문학적 토대의 줄거리를 거부하고 영화를 구성하는 매체적 특성에 주목한다. 즉 편집, 촬영, 이미지 등이 영화의 재료가 되는 필름, 스크린, 영사기, 조명, 공간 등에 의해 어떻게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으로, 미술로 따지면 개념미술과 가깝다. '독립영화'는 제작시스템에서 정의되며 대기업 자본의 상업영화와 대립적 용어로 사용된다. '예술영화'는 가장 복잡하면서도 모호한데, 1907년 프랑스의 '필름 다르'라는 회사가 오락거리 영화와 구별하고자 유명한 연극, 문학작품을 영화로 제작하는 데서 '예술로서의 영화'가 시도되었고, 이후 '독일표현주의', '누벨바그'처럼 관객의 호응보다 감독의 주관을 강조한 극영화들을 예술영화라고 칭하고 있다. 현재의 예술영화전용관이 유명 소설이나 위인을 바탕으로 한 '못'만든 영화도 상영하는 이유가 이러한 배경이 될지 모른다. 이처럼 실험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는 동일한 용어나 장르도 아니지만 일부 교집합을 이루며 상업영화의 대안적 영화로서 상생해오고 있다.

예컨대 80년대처럼 70년대까지 작게나마 활동했던 한국의 실험영화 제작이 급속하게 줄어들고 독립영화라는 용어로 편입된 시기를 볼 수가 있다. 군부쿠데타로 인해 광주를 비롯한 민주화운동은 대안적 영화 역시 예술적 가치보다는 사회문화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매체적 실험이 아닌 사회표현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영화의 잠재적 힘에 더욱 주목한 것이다. 기존의 실험영화가 관습적 영화를 형식적으로 바꾸는 시도를 해왔다면, 80년대의 실험은 형식적인 것이 아닌 현실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더욱 도전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실험영화가 독립영화 시스템에 편입되어 실험이라는 가치보다는 독립, 자주라는 가치가 우위가 되어 함께 활동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한국 실험영화는 90년대에 故권병순과 뉴이미지 그룹(한국실험영화연구소의 전신)을 통해 활동을 다시 드러낸다. 권병순은 실험영화와 비실험영화의 정의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자했던 연구자로, 실험영화제와 제작워크숍, 심포지엄 등을 통해 한국 실험영화로서의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지병으로 타계한 이후 권병순이 이끌었던 연구소 역시 해산되었지만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 실험영화가 지속되는 데에 중요한 자리매김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영화사에서 실험영화는 배제되어야할 장르이면서도 세계영화의 흐름에 영향을 끼쳐 온 장르로서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1960년대부터 영화를 선전도구로서 사용하고자 했던 정부는 국제영화제 진출을 도모하는 정책을 펼치는데, 독일의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에 출품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면서 실험정신이 아닌 반공 색채를 드러낸 작품을 출품시킨다. '오버하우젠 선언'으로 유명한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는 가장 혁신적인 영화들을 소개하는 영화제로, 통제, 검열과 동시에 '우리도 잘 만들 수 있다'는 모순된 의지의 일례를 보여준다. 올해 5월 64회를 맞이한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에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필름앤비디오 아카이브의 한국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지난 64년 동안의 영화제에서 한국의 60-70년대 실험영화는 처음 소개된 것으로 해외 영화관계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유통의 문제를 꼬집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결코 짧지 않는 한국의 실험영화 정보가 가까운 일본, 중국과 비교할 때 너무 없다는 것이다. #그림2왼쪽#

세계영화사 1세기를 지나 한국영화 100주년도 곧 맞이한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쏟아질 것이다. 시대도 변한 지금에서 질곡의 한국영화의 역사와 그 안의 실험영화가 어떻게 소개될지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김지하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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