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36>비운의 성악가 오경심- 여순반란사건 부역 사형집행때 '봉선화' 불러 유명

입력 2018.06.12. 00:00 최민석 기자
그녀의 절절한 목소리에 실린
노래는 한 대목 한 대목 온
군중의 가슴속에 박히며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회한을
자아냈다. 노래의 긴 여운은
총소리와 함께 결국 여인은
역사의 그늘 속으로
오경심 민주일보 기사

오경심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그 빼어난 재능으로 인하여 비극적인 삶을 살고 간 비운의 성악가이다. 또 당시 험난하고 혼란스런 시대상황으로 인해 그녀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어 추적이 어렵다. 다만 그러한 민족적 비극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성악가 오경심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들인다.

오경심(1914.1.15.~?)은 평안남도 평양부 수복리에서 태어났다. 평양정희학교를 다니다 순천매산학교로 전학하였다. 여기서 고등과 1년을 수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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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광주 수피아여중 2학년으로 편입하여 1932년에 졸업하였다.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를 다녔다. 이때부터 그녀는 천부적인 두각을 나타내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여류 성악가로 우뚝 섰다.

'본보 창간 15주년을 기념하여 순천지국에서는 소프라노 천재인 오경심 양의 독창회를 오는 13일 매산학교 강당에서 개최하리라 한다.'(1935년 4월 12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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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독청년회와 본보 광주지국 후원의 성악가 오경심 양 독창회는 지난 6일 오후 9시 숭일학교 강당에서 최영균씨 사회로 개최하였는바, 양의 독특한 목소리는 만장관중을 도취시키고 동 11시에 무사히 산회하였다고 한다.'(1935년 7월 10일 동아일보)

1938년 오경심은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이 해 6월에 조선일보 가 주최한 '신인음악회'에서 다시 이름을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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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중 박만고(朴萬古)와 결혼하였고, 이후 전라남도 순천으로 내려가 순천사범학교 음악교사가 되었다.

'오경심은 순천사범학교 음악교사로서 소프라노 가수였다. 그녀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부역하여 구 법원 앞에서 사형집행을 하려고 할 때 봉선화 노래를 불러 유명하기도 하다'(순천문화원 '순천·승주향토지'1975)

"여자의 이름은 오경심. 순천사범학교 음악교사이며…. 그녀의 절절한 목소리에 실린 노래는 한 대목 한 대목 온 군중의 가슴속에 박히며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회한을 자아냈다. 노래의 긴 여운은 총소리와 함께 결국 여인은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세월은 흘러 오래된 사진처럼 낡고 곰팡이 낀 그 얘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순천·승주향토지편찬위원회, '순천·승주향토지'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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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과 1978년에 발간된 '순천·승주향토지'의 오경심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오경심은 왜 좌익이 되었고,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은 것일까?

'8·15 훨씬 전에 음악활동을 중지하고 시내(서울) 북아현동 집을 걷어치우고 전남으로 간 뒤 아무 소식이 없더니, 미소공위(美蘇共委) 재개 때인 작년(1946) 6월에 어떤 친구가 덕수궁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친정차로 지방에서 온 모양으로 옷맵시도 시골 여인 같았으나, 유달리 커다란 눈이 변함없더라고 하더군요. 드라마티크 소프라노라 그러겠으나, 성격이 격렬한 편이라고 할까요.'(민주일보 1948년 11월 17일)

이 신문의 기록에 의하면 오경심은 순천사범학교 음악교사를 그만 두고 서울로 상경하여 북아현동에 살았다. 그리고 음악활동도 중지하고 지내다 다시 순천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오경심은 그의 남편 박만고를 만나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박만고는 책에 파묻혀 살았으며 여순반란사건 시기에 '3일 군수'라는 말을 들었다 한다. 이런 연유로 그들 부부는 체포되었지만 당시 여러 신문에 개재된 오경심에 대한 재판기록을 보면 오경심 부부는 순천 시내에서는 사형되지 않았다.

호남지역 반란군에 관련된 '지방민 폭도에 대한 제1차 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 판결'인 1948년 11월 13일자 '계엄지구 법무처 제2호'의 내용이다.

'무기 징역(사형에서 감형된 9명)은 정삼태(丁三台), 송순홍(宋淳弘), 박만고(朴萬古), 서동엽(徐東葉), 김석기(金錫基), 임봉조(林奉祚), 최영완(崔永完), 주민석(朱晦錫), 오경심(吳敬心) 이상.'(호남신문, 1948년 11월 13일)

이 기록에 의하면 오경심과 그녀의 남편 박만고 등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9명이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오경심과 그녀의 남편은 순천 시내에서 처형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이 여순반란사건과 관련되어 무고하게 즉결처분되었다. 그런 연유로 오경심도 처형되었을 것으로 짐작했고, '오경심과 봉선화'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입에서 입으로 건너지며 애절한 역사의 한 토막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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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23일이다. 당시는 여수와 순천을 반란군이 장악하고 있을 때다. 이날 여수에서 인민위원회 최고심사위원회가 120여명의 양심적인 경찰과 우익진영 인사들을 석방하였다. 그런데 행동대장 서종현 일파가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평소 감정이 안 좋던 경찰관들과 우익인사들을 도로 잡아다가 사살해 버렸다. 이때 김창업(대한노총지부장)이 처형장에서 '봉선화'를 불렀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오경심의 봉선화는 그저 전해지는 이야기만 있고 기록에는 없으니, 그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다. 또 한국전쟁 당시 오경심이 인민군 장교가 되어 순천에 나타났다는 기록(순천시사-정치사회편.1997)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적이 묘연하니 생사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아직도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고착화 되었다. 하지만 4·27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예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우리나라 토종 꽃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렸던 '봉선화' 3절 노랫말이다. 통일의 그날까지 이 '봉선화'와 '오경심'은 여전히 분단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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