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바람이 멈춘
저녁 언덕에 나는 서있네
저 먼데 홀로 있는 나무
그곳까지 얼마나 가야하나
저기 저 마을 집에는 누가 살까
황혼을 등에 지고 길을 떠나네
나무숲을 지나 거센 강을 건너
잃어버린 노래
쉰 가슴으로 부르며 길을 떠나네
저 별 내리는 곳에
저 바람 머무는 곳에
그대는 있을까
훠이 훠이 쉰 노래 부르며
길을 떠나네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이여
내 곁에 머문 그대여
(한희원)
오늘은 트빌리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 시그나기를 찾아가는 날이다. 시그나기는 트빌리시 삼고리 역에서 출발해 1시간 이내로 갈 수 있는 곳으로 해발 800m정도 되는 절벽 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옅은 붉은색을 띤 벽돌로 지은 집들이 절벽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에 환호성을 지르게 된다. 푸른 사이프러스와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숲속에 은은한 자태를 지닌 붉은 집들이 꽃처럼 박혀있다. 시그나기를 조지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는 이유를 충분히 알겠다.
시그나기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은 18세기 들어 외부의 침입이 심해져서 만들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성곽이 마을을 둥지처럼 감싸 안고 있어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이 성곽의 길이가 자그마치 5km에 달하며 성곽에는 23개의 타워가 있다.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성곽을 따라 걸으며 절벽 아래로 펼쳐진 대평원과 멀리 코카서스 산맥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아쉽게도 지금은 성곽 전체를 공개하지 않아 일부만 걸을 수 있다. 주위의 풍경이 워낙 빼어나 걷다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자갈이 깔린 길을 걸어 마을로 들어갔다. 가게들이 화려하지 않고 제각각 아름다운 개성을 드러내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자꾸만 가게를 기웃거리게 된다. 그러다가 전망 좋은 카페나 레스토랑에 들어가 와인을 마시며 알라자니 평원과 끝없이 펼쳐지는 코카서스 산맥을 바라본다. 마음은 벌써 한 마리 새가 되어 거침없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와인 몇 잔에 취한 게 아니라 풍경에 흠뻑 취한다. 평원과 고봉의 산맥들을 바라보면 영혼은 자유로워지고 길을 따라 또 다른 여행지로 서둘러 떠나게 되는 마력이 숨어 있다.
평원을 가로지르는 하얀 길은 상상을 인도하는 끈이다. 시그나기의 옅은 황톳빛과 은은한 붉은 색은 이제 막 피어난 붉은 장밋빛이거나 감나무에 매달려 떨어지기 직전의 홍시색이다.
시그나기는 조지아에서 포도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카헤티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카헤티 지방에는 시그나기와 텔라비가 있다. 두 마을이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여행객들의 눈을 호사스럽게 해준다. 시그나기가 '사랑의 마을'이라 불리어진 이유는 비운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니코 피로스마니는 시그나기 인근의 작은 마을 미르자니(Mirzaani)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와 러시아 혁명 때 가난한 노동자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생의 마지막에는 트빌리시 역에서 노동을 하며 죽어간다.
피로스마니는 이곳에 머물렀던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에게 사랑에 빠져 전 재산을 털어 장미를 사기 시작했다. 급기야 자신의 피까지 팔아 수만 송이 장미를 사서 수레에 싣고 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마르가리타는 피로스마니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남자와 떠나버린다. 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염원하듯 시그나기에는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혼인신고를 할 수 있는 결혼 등록소가 있다. 직원들은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며 결혼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전 세계에서 라스베이거스와 시그나기 두 군데에 이런 결혼 등록소가 있다고 한다.
조지아에서는 결혼 등록소에서 공증인과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신랑 신부가 증명서에 사인을 하여야 결혼을 인정해 준다. 양가 부모는 등록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니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집안의 반대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시그나기 공원에 올라가면 시청사가 보이고 숲속에는 노점상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을 진열해 놓고 관광객을 유혹한다. 특히 털실로 짠 물건들이 많아 구경하면서 미소를 짓게 한다. 공원에는 시그나기 태생의 철학자 도다쉬빌리의 이름을 딴 도다쉬빌리 광장이 있다. 그리고 광장 암벽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이 지역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붉은 기와에 새겨진 부조로 된 그림과 이름에 세월이 스며들어 경건함을 배가시킨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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