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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35> 텔라비 길목의 인연

입력 2020.07.09. 09:14 수정 2020.07.09. 19:18
기억 너머 아련함에 발걸음 멈추네
바람을 그리는 화가

생의 시간을 걸으며

생의 시간 속을 걷는다

시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

침묵하고 침묵한다

강가에 서서 강이 되고

나무에 기대어 나무가 된다

바람이 밀지 않아도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짙은 밤이 아니어도

별이 어디선가 떠 있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높은 산 너머에 바람이 오고있다

이렇게 하얀 길을

나는 혼자 걷는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호흡도 없는 공간 속에서

말없이, 없이

생의 시간 속을 걷는다

(한희원)


텔라비로 가는 길은 김중호 선교사 부부와 동행했다. 선교사님과는 우연히 만났다. 트빌리시의 숙소에서 오후가 되면 그리던 그림을 접고 자바하시빌리를 어슬렁거렸다. 자바하시빌리는 낡고 오래된 가구를 파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네였다. 건물의 벽채는 수십 년 동안 방치되었는지 퇴락한 모습이었다. 좁은 인도에 늙은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서 걷기가 힘들었다. 트빌리시 거리는 바닥이 울퉁불퉁한 석조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아 보행이 불편했다. 그러다보니 몇 달 만에 신발이 다 헤지고 오래 걸으면 무릎에 통증이 자주 찾아왔다.

바하시빌리 숙소 앞 풍경

매일 똑같은 길을 걷다 보면 아끼느라 서랍 속에 감춰둔 보석을 발견하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 너머 아련함을 주는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철제로 주조된 대문이며 창틀,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룬 건물, 낡은 건물 사이에 있는 와이너리와 레스토랑은 하나같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작은 화랑과 마주하고, 무심코 들어간 레스토랑이나 바의 실내장식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독특한 개성이 섞여져 있어 인상 깊었다. 거창하고 세련되진 않지만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모습들이다. 어두운 수풀 속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장면이었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레스토랑 '돔(DOM)'도 그런 곳이다. 에메랄드빛이 가미된 바다색의 블루, 갈색 톤의 피아노, 낡았지만 기품 있는 철제 장식들이 어우러진 가게였다. 변두리에 있는 레스토랑치고 가격이 제법 비쌌다.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은 드나들지 못할 것 같은 곳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쇠잔했지만 그런 풍경들이 가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가끔 용기를 내어 혼자 '돔(DOM)'에서 스파게티나 맥주를 시켜 먹곤 했다.

김중호 선교사 부부와는 '돔(DOM)'에서 처음 만났다. 몸집 좋은 미남형의 동양인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혼잣말로 '중국 사람인가'라고 중얼거렸는데 한국 사람이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트빌리시에서 한국인을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먼 타지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우연히 만난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선교사님은 어릴 적 꿈이 화가였다며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다. 조지아에 와서 한국말로 나를 드러내며 말할 수 있어서 기뻤다. 비록 초면이지만 한국말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쿠라강을 거닐며

선교사님은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에서 18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는 분이다. 지금은 텔라비에서 살지만 가끔씩 트빌리시에서 며칠씩 지낸다고 한다. 고국을 떠나 이국생활을 하면서 숱한 사연이 많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텔라비 근교에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아제르바이잔에서 선교활동을 해서 조지아로 옮긴 이후에도 그들과 계속 인연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텔라비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트빌리시에서 산길을 넘어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텔라비 입구에 도착하였다. 이곳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흐릿한 기억 속을 헤매다가 점점 선명해지며 나타나는 거리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동안 다녔던 조지아의 여러 도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텔라비는 러시아의 자취가 깊게 남겨져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풍경이었을까? 우연히 보게 된 제 3세계 영화 속 풍경이었을까?

수백 년 간 묵묵히 거리를 지키고 있는 플라타너스, 고흐의 그림에 등장한 모습을 한 채 걷는 사람들, 드문드문 쇠락한 거리를 서성이는 사람들, 낮은 키의 하얀 건물, 스산한 바람결을 따라나섰다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내 마음. 세월이 정지된 마을 텔라비에 드디어 들어섰다.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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