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산에 일궈낸 천년 꿈의 빛깔은
떠도는 바람
바람만 떠도는 것이 아니다
별만 뜨고 지는 것이 아니다
일초에 몇 번씩 우리 마음은 떠돌고
하루에도 수없이 뜨고 지고 한다
별처럼 바람처럼
외로움도 모른 채
홀로 떠돌면 좋으련만
너를 잊지 못하는 내 마음은
바람이 되어도
별이 되어도
홀로 있지 못하구나
바람아 말해다오 너의 먼 여행을
별아 말해다오 너의 자유로움을 -한희원
동굴의 도시 바르지아로 향하면서 청마 유치환의 시 '바위'가 스치듯 떠올랐다. 거대한 바위산을 뚫고 깨어내 인간의 무리가 살아갈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다. 안에 있는 속살을 파고들수록 탄탄했던 생명력도 삶의 의지도 망각하게 된다. 어두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원뢰(遠雷) 뿐이다.
동굴 도시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500m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산을 13층 높이로 깎아 도시를 형성한 천 년 전 그들의 꿈은 무슨 빛깔이었을까.
바르지아의 동굴 도시 내부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교회와 와인 저장고, 목욕탕 등 도시 기능이 잘 갖춰져 있어 관람객의 이해도를 높여준다.
멀리에서 바위산을 올려다보면 여러 가지 모양의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어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오브제로 한 설치미술 작품으로 착각하게 된다.
여기는 얼마 전에 다녀왔던 평야에 비스듬히 누운 우플리스치헤의 동굴 도시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산 아래에서 주거지까지 접근이 쉽지 않다. 방과 방을 연결하는 동굴 속 길은 너무 좁아 숨이 막히고 걷기조차 힘들다. 몸을 숙이고 움츠리며 걷다가 절벽 끝에 자리 잡은 교회와 집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 서면 드넓은 평야와 굽이치며 도도히 흐르는 므트크바리강이 펼쳐진다. 장엄한 풍경에 빠져 있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꿈꾸듯 기도를 드렸다.
바르지아는 12세기에 게오르기(Giorgi) 3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요새로 지어졌다. 이후 조지아의 가장 위대한 여왕이었던 타마르 여왕에 의해 동굴 도시로 변모했다. 1283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뒤 복원되었다가 16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동굴 도시는 안타깝게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미로와 같은 동굴의 길을 걷다 보면 타마르 여왕을 그린 동굴 벽화를 보게 된다. 바위에 새겨진 고색에서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영광과 마주한다. 타마르 여왕의 영혼은 지금도 이곳을 떠돌고 있을까.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없는 깊은 밤에 천 년 전 그들이 이곳에 모여 못 다 한 꿈을 이야기할까. 처량한 이들은 어느 별에서 떠돌고 있을까.
바위산을 오른 후 므트크바리강 주변에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진한 커피를 마셨다. 우플리스치헤에서 오랫동안 강을 지키는 자작나무와 포플러나무에 기대어 세차게 흐르는 강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바르지아의 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강길을 따라 흐르고 있다.
동굴 도시로 오르는 산 언덕길에 외국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걷고 있다. 산 입구에서부터 동굴 도시까지 셔틀버스가 있지만 그들은 바람이 미는 대로 꿈을 꾸듯 묵묵히 걸었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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