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과 야생화 사이를 바람과 함께 걸으며
부칠 수 없는 편지
부칠 수 없는 편지를 매일 쓰고 있다
하얀 편지지에도
그림엽서에도
비에 젖은 유리창에도
흐릿한 너의 마음에도
오래전 쓴 편지는 희미해지고
빛바랜 시간들은 어디로 떠나고 있나
우체국 앞을 서성이다
주소도 잊어버린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되돌아온다
먼 고원을 나는 새야
전할 수 없는 내 마음을 너에게 보낸다
부칠 수 없는 편지여
부칠 수 없는 너의 편지여
나의 슬픈 시간들이여 -한희원
1997년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림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에 교사직을 던졌다. 퇴직금으로 작은 서점을 열고 옥상 가건물에 화실을 차렸다. 그렇지만 작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인 것 같다. 마음을 이리저리 휘몰아 달리는 바람처럼 이도저도 못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처음 벌인 서점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화실에 들어서면 붓을 들 수 없는 상태였다.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교직에 있을 때도 매일 5시간 정도는 작업을 유지했다. 학교근무가 끝나 집으로 오면 다시 화실로 출근하여 작업하였다. 체력도 있었고 집중력도 있었다. 결심을 하고 사표를 쓰고 온통 그림 그리는 일에 매달릴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환경이 변한 탓인지 의지가 약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왔다. IMF가 오기 전이라 무언가 알 수 없는 어둠이 사회 저변에 깔려있었다.
그림이나 시는 마음의 중심. 자신도 알 수 없는 영혼에서 발원된다. 영혼의 중심이 충만하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고 억지로 그림을 그려도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서점에서 빠져나와 길을 걷고 싶었다. 오랜 시간 길을 걷다 보면 마음의 잡념이 사라지고 영혼의 중심에 있는 '어떤 정신'을 만나지 않을까. 그해 여름 무더움과 함께 섬진강 도보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북 진안의 데미샘에서 시작되어 광양 망덕까지 홀로 걷고 또 걸었다. 매일 하루 종일 걷다보면 마음도 없는 무아의 상태에서 걷는다. 잡념이 사라지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작업에 대한 진정한 욕망이 생긴다. 걷는 일은 고통을 수반한다. 일군의 사람들은 고통을 알면서도 잃어버린 자아를 만나기 위해 걷는 일에 도전한다. 제주도나 지리산을 넘어 히말라야, 산티아고, 티벳의 고원길을 걷는다.
조지아의 트레킹 코스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처음 조지아를 와서 차를 타고 달리다 시골마을을 감아도는 므뜨끄바리강을 보고 그 모습에 감탄했다. 풍부한 수량으로 굽이쳐 흐르는 물살이 고산을, 평야를, 마을주위를, 나무숲 사이를 흘렀다. 나는 속으로 조지아 여행에 므뜨끄바리강을 따라 걷는 트레킹코스를 개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은 여행사차원이 아닌 조지아 국가차원에서 할 일이다. 트레킹 코스의 개발은 여행사에는 경제적인 이득이 되지 않는다. 걷는 일은 돈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안전하게 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면 트레킹을 좋아하는 외국인이 몰려들 것이다. 외국인들은 단순히 트레킹만 하고 가는 것이 아니다. 조지아는 국토의 면적이 크지 않기 때문에 트레킹과 관광을 함께할 수 있다. 트빌리시에 있으면서 트레킹만 하기 위해서 오는 여행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소수의 인원으로 여행을 하였다. 조지아의 트레킹은 고산을 오르는 경우보다는 산을 바라보거나 옆에 두고 산언덕을 걷는 경우가 많다. 풀잎과 야생화 사이를 바람과 함께 걷다가 마을을 만나면 몇 잔의 와인과 함께 휴식을 취한다. 조지아인들은 음악을 좋아해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행운도 있다. 나는 지금도 우쉬굴리의 대평원을 걷는 일을 잊지 못한다. 내일은 카스벡 산이 있는 스테판츠민다 마을 지역의 추타 트레킹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벌써 마음속에 한줄기 구불한 시 같은 길들이 찾아온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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