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바투미下
몇 해 전에 인도 북부 자치공화국인 라다크를 간 적이 있다. 사륜구동을 타고 먼지를 휘날리며 5,000m가 넘는 고개를 넘어가는 순간 라다크의 수도 '레'가 눈앞에 펼쳐졌다. 색이 바랄대로 바란 황토색의 산과 언덕 사이로 미루나무가 푸른 옷을 입고 무리지어 직립해 있었다. 마을 집들은 햇빛에 반사되어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밤에는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네팔에서 온 청년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미루나무에 걸쳐 있는 별들을 보았다. 카슈미르(Kashmir)와 스리나가르(Srinagar)로 가는 초원의 유목민들. 그들이 씩 웃으면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고독이 미소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보았다. 이들에게 거창한 철학이나 신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의 삶이 노자나 소크라테스가 얘기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먼 길을 돌다가 순천의 바닷가인 와온에서 저무는 해를 바라본 적이 있다. 라다크를 여행하면서도 와온의 바닷가가 문득문득 떠올랐다. 와온의 바다는 너무 조용해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소리도 숨을 죽였다.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마저 안으로 안으로 울음을 삼켰다.
조지아의 항구 도시 바투미는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수많은 침략과 점령을 당한 도시이다. 흑해는 동유럽과 우크라이나, 러시아, 터키 같은 열강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오랜 기간 얽히고설킨 역사의 수레바퀴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매서운 겨울에도 유일하게 얼지 않는 흑해에 함대가 주둔하고 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인 남북 분단의 협정을 맺은 얄타도 이곳 크림반도에 있다.
바투미는 아자르 자치공화국의 수도다. 인구는 12만 정도로 트빌리시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중세부터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한때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였다. 17세기에는 오스만의 지배를 받아 주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수난을 겪었다. 1878년 러시아에 병합되었으며, 1901년에는 스탈린이 이곳에서 파업을 주도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에는 터키와 영국이 일시적으로나마 점령한 곳이기도 하다.
바투미는 휴양도시일 뿐만 아니라 조지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상공업이 발달된 도시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로부터 송유관을 연결해 석유를 공급받아 정유 공장과 조선업, 기계공업 등의 중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바투미의 여행은 Medea Square(메데이아 광장)이라 불리는 Europe Square(유럽 광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마녀로 표현되는데 이곳 광장에 있는 탑 위에 메데이아 상이 세워진 것을 보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바투미는 현대식 건축물과 고딕, 바로크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유럽광장 주변으로 시대를 달리하는 건축 양식이 즐비해 과거의 여러 시간대 속으로 걸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바투미에 저녁 무렵이 되면 낭만적인 버스킹이 열리는 작은 광장이 불빛에 반짝인다. Piazza Square(피아짜 광장)이다. 바닥 전체가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주변 건물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장식된 우아한 고딕과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광장을 감싸고 있다. 저녁에는 거리의 악사들이 음악을 들려주는 광장의 야외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면 여행의 낭만과 휴식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는 행운을 만나게 된다.
도심 인포메이션 센터 옆 Argo Cable Car(아르고 케이블카)에 탑승하면 Anuria산 정상까지 2,586m를 지나면서 흑해를 바라보며 이동할 수 있다. 흑해 연안을 따라 6㎞ 이상 잘 가꾸어진 공원과 현대와 중세풍의 아름다운 건물들. 레스토랑과 카페 사이를 걷다보면 조지아의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달콤한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130m에 이르는 Alphabetic Tower는 조지아 알파벳을 나선형 모양의 띠에 새겨놓았다. 타워 꼭대기에 오르면 멀리나마 흑해나 바투미를 조망할 수 있다. 대관람차 옆 Ali and Nino(알리와 니노)상은 조지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의 소년과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 소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많은 역사가 흐르는 흑해 연안에 해가 저문다. 저문 해는 모든 사연을 안고 바다 너머로 사라진다. 바투미에 하나씩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항구 바투미!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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