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비경을 간직한 샤틸리 (상)
깊은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고
슬픔이 슬픔을
연민이 연민을 위로하는 계절
낮은 언덕은 비스듬히 누워
시간의 그림자들이 지나가는
길을 내어준다
바람이 떠나간
언덕을 넘어
들녘을 지나
산과 강을 건너면
머나먼 곳에서 빛나는
꺼지지 않는 기다림
아, 너의 미동치 않는 촛불
너무나 눈부신
참혹한 서정의 시간이여!
한희원의 시 '참혹한 서정'
오래 전 티베트 서부의 성산 카일라스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세상의 모든 산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산. 인간에게 섣불리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 산. 성산 아래 신의 눈물이 고여 있는 마나사로바 호수.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의 발상지 카일라스. 전 세계 순례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 카일라스. 우리들 일행은 꿈같은 수수께끼에 이끌려 미지의 세상 샹그릴라를 찾아 장도에 올랐다.
카일라스로 가기 위해서는 북경에서 티베트의 수도 라싸를 거쳐 가는 길을 주로 많이 선택한다. 북경에서 출발하는 기차여행의 길고 고단한 설렘과 티베트 불교를 상징하는 라싸의 웅장한 사원의 성스러움을 보며 카일라스로 향하는 순례 길이 훨씬 풍요롭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중국 국경을 넘어 카일라스로 가는 행로를 택했다. 티베트의 고원을 끝없이 달리며 가다가 들녘이 보이면 별과 함께 야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끝을 보며 달리는 순례자의 길. 깊고 고요한 유목민의 눈빛. 고원과 고원 사이를 떠도는 별빛. 차갑게 따라오는 새벽의 눈썹 달.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하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떠돌이 여행자들이 카멜 시장의 호텔에다 여장을 푼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를 걷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내일 있을 등정을 위해 긴장감이 감도는 모습으로 삼삼오오 시장을 누빈다. 밤이 되면 카멜 시장의 술집들은 팽팽한 긴장감과 자유로움이 섞인 세계 각국의 언어들이 난무하며 밤을 지새운다.
우리 일행은 복잡한 카멜 시장에다 여장을 풀지 않고 카트만두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의 고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수선스러운 거리를 벗어나 숲 속에 있는 네팔의 오래된 성을 개조해서 만든 조용한 호텔.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성산 카일라스로 가는 우리 일행의 무탈함을 기원하기 위함이리라.
카트만두에서 사륜구동에 몸을 싣고 한참을 달린 후 숲길을 걸어 옛 성을 개조한 호텔에 당도했다. 암갈색 석조와 붉은 벽돌로 만든 성은 신화 내음을 담은 채 우리를 맞이했다. 카트만두 시가지를 넘어 히말라야의 고산 머리에 내려앉은 하얀 만년설 위에 붉은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테라스에 앉아 미동도 없이 거대한 존재로 서 있는 산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지 된 생의 시간들.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이 느껴졌다. 신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순례자들은 여행의 고단함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목조로 지어진 호텔 발코니에 앉아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샹그릴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지아에도 옛 모습 그대로의 비경을 간직한 고성이 있다. 중세의 신화를 그대로 간직한 채 지나온 세월의 잔 때가 묻어 있는 숨은 절경이 샤틸리이다. 이곳은 조지아인들도 쉽게 찾아오지 못하는 곳이다. 탐험가 기질이 있는 순례자들이 숨어 있는 비경을 찾아서 오는 곳이 샤틸리이다. 트빌리시의 가장 큰 매력은 몇 백 년의 세월을 머금은 도시의 건물들이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도시를 걷다보면 마치 과거여행을 하는 여행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험한 산맥 사이에 숨은 샤틸리는 더 오래 된 시간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조지아인들도 쉽게 찾아오지 못하는 샤틸리. 그 비밀의 정원 속으로 떠나간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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