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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그림 속 마을과 인물에 조지아의 숨결과 신화가···

입력 2020.12.18. 09:20 수정 2020.12.18. 14:26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56> 조지아의 여류 화가 엘렌 아크블레디아니
한희원 작 '마르자니쉬빌리 지하철역에서 책파는 여인'

밤새 눈이 내린다

나는 별빛이 사라진 밤 내내

눈 쌓인 늙은 나무 곁에 앉아

낡은 추억을 버리고 있었다

거리에 흩어진 추억 위로

흰 눈이 차곡차곡 쌓였다

세상의 모든 피팍한 人生의 의미 위에도

버려진 앨범의 두께만큼

밤새 흰 눈이 쌓인다

눈물이 가로등 불빛이 되어 흩어진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슬픈 것

눈 내리는 밤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이다

눈 내리는 밤

나는 오랫동안 나무가 되어 서 있었다

눈물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한희원의 시 '눈 내리는 밤')


쇼타 루스타벨리 동상이 마주보고 있는 곳에 아름다운 건물이 서 있었다. 아치형의 둥근 기둥이 건물을 받쳐주고 짙은 아이보리색이 퇴색된 채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트빌리시 거리의 화가들이 건물 아래에 있는 계단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덩치가 큰 사내들이 뭉툭한 손으로 가느다란 세필 붓을 잡고서 예쁜 색채로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생소했다. 내 자신이 조지아 화가들의 작품에 문외한인지라 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거리의 화가들은 여행자들을 상대로 그림을 팔기 때문에 형태나 색이 부드럽고 화려하다. 조지아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현했으리라 생각된다.

거리의 화가들이 있는 계단에서는 물감이나 붓, 캔버스, 이젤 등을 널어놓은 채 판매하고 있었다. 트빌리시에서는 직접 손으로 만든 기타를 거리에서 판매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렇듯 트빌리시는 노점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이 매우 다양하다.

계단에 놓여 있는 물감을 뒤적거렸더니 안쪽에서 러시아풍의 우람한 사람이 나와 나를 바라본다. 사고 싶은 물감을 물어보니 알아들었다는 몸짓을 하면서 나를 지하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내 옆구리에 끼어 있던 화집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조지아 화가 중에서 니코 피로스마니는 외부에 많이 알려졌지만 그 외의 다른 화가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화집의 주인공인 여류 화가는 조지아인이 사랑하는 화가인 것 같았다.

한희원 작 '첼로 켜는 사람'

온갖 낙서 그림이 그려진 어두운 지하도 안에서 젊고 잘생긴 젊은이들이 벽에 기대서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부신 외모 뒤에서 조지아의 궁핍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교차되어 보였다. 트빌리시 변두리지역의 거리를 걷다보면 낡고 퇴락한 집에서 화려한 옷맵시를 한 아리따운 여인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고달픈 현실과 생에 대한 애착이 동행하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저려왔다.

버스킹을 하는 젊은이들의 모자에 적은 돈이나마 쥐어주고 러시아풍의 건장한 사내를 따라갔다. 그곳은 지하도 한 구석에 비밀통로처럼 웅크리고 있는 창고처럼 보이는 화방이었다. 벽에는 싸구려 느낌이 나는 캔버스가 널려 있고 제법 갖추어진 액자 모형들이 걸려있었다. 이 낡은 화방은 캔버스와 액자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아크릴 물감 몇 개를 사서 비닐봉지에 넣어 지하도를 벗어났다. 짐작컨대 이 근처에 근사한 화방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옆에 끼고 다녔던 화집을 펼쳐들었다. 이국땅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화가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은 설렘이 일었다. 바이칼을 여행할 때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바이칼 호수 주변의 마을을 걷다 우연히 들어간 농가에서 그림을 그리는 늙은 여류 화가를 만났었다. 정원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화실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들이 가득했다. 눈에 익지 않은 독특한 그림이었지만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화집은 러시아어와 조지아어로 되어 있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엘렌 아크블레디아니(1898.4.5.~1975.12.30)라는 여류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20세기 조지아의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 연극장식가였다는 정도의 정보만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은 색이 화려하지 않았다. 어두운 색들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지만 마을과 인물에서 조지아의 숨결과 신화가 담겨있었다. 마치 꿈들이 세상에 나와 떠들며 거닐고 있는 것 같았다. 잿빛의 마을과 거리에 서 있는 나무 아래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조지아 사람들에게서 꿈꾸는 신화의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루스타벨리에 있는 조지아 국립미술관에서 화집에 실린 작품들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작품을 감상했다. 그녀의 그림 속 인물과 풍경은 끊임없이 바라보며 움직이고 대화하며 사색하게 하였다. 그것은 살아있는 조지아의 신화였다.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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