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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화순 가는 길

@전동호 전남도 건설교통국장 입력 2020.05.18. 16:18 수정 2020.05.20. 18:30

광주에서 17번 시내버스가 다녔다. 지원동을 지나면 우측으로 개천이 길게 내려왔다. 그 위를 작은 다리가 건너고 논과 밭을 가르는 좁은 길이 이어졌다. 찻길을 따라 마을과 정미소, 저수지, 승강장이 함께했다. 초등학교도 있었다. 버스 문이 열리면 단정히 차려입은 갈색눈동자의 선생님이 내리곤 했다. 5월 차창으로 들어오는 만산은 크고 작은 신록을 자랑하며 짙어져갔다. 그 위를 송화가루가 날았고 아카시아 꽃은 단내를 풍기며 벌들을 불렀다. 어느 순간 밤꽃 향이 진해지며 콧등에 땀방울이 솟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후반 3년을 넘게 내 눈에 비친 화순 가는 길의 풍경이다. 너릿재터널을 통과하면 왼편으로 절개지가 나왔다. 가림녹화를 위해 선택한 등나무 넝쿨이 비탈을 타고 오르며 다른 나무와 얽히고설키는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매년 연보랏빛 꽃을 보여주었고 오른쪽 왕벚나무는 이십곡리 초입을 지나며 제법 오랫동안 각기 다른 모양과 색으로 피어났다. 이때쯤 갓길에 황토를 뿌리고 코스모스 모종을 심었다. 한들한들 피어있는 가을 길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사진을 찰칵거리던 날도 있었다.

당시 화순은 광주에서 장흥, 보성, 고흥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1971년 너릿재에 왕복 2차로 터널이 뚫리기 전까진 굽이굽이 산등성을 돌아야했고 한 겨울에 눈이 내리면 찻길이 한 달여 두절되기도 했다. 1992년에 기존 터널 옆으로 하나가 더 나고, 1999년 칠구재와 2007년 너릿재에 새 길과 터널이 4차로로 개설되면서 한결 편리해졌다. 옛길은 기억의 장소가 되어 작은 미술관과 커피숍이 들어서며 오가는 길손들을 잠시 멈추게 한다.

화순은 광주와 인접해있을 뿐 무등산, 백아산, 모후산, 계당산 등에 둘러싸인 산지가 74%나 될 정도로 많다. 삼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읍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탄광과 관련돼있어 오지로 여겨졌고 공무원은 벽지수당과 승진가점까지 받았다. 그렇지만 세계유산 고인돌, 천년고찰 쌍봉사, 천불천탑 운주사, 창랑천 적벽, 능주 영벽정 등 곳곳에 문화와 역사가 살아있다. 그 백미는 1971년 여름 도곡 대곡리에서 엿장수에게 팔려가다 살아난 청동거울과 세형동검 등 국보 제143호 청동기유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화순은 1914년에 형성됐다. 마한 여래비리국, 백제 잉리아현, 통일신라 여미현, 고려 능성현, 조선 동복현과 능주목으로 달리 부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늘 화합하는 넉넉한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볼거리도 많다. 특히 2012년 미국 CNN이 한국에서 가봐야 할 50곳에 선정한 세량지가 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이른 아침에 산 벚이 물안개와 햇빛을 만나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비경이 수없는 카메라 앵글에 담겼다. 철길이 무릉도원을 만나는 도웅리,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넘치는 수만리와 바람도 쉬어가는 유마사 길 또한 좋다.

옛 화순은 탄광과 오지, 깨끗한 수원지, 유황온천과 게르마늄온천이 있는 청정이미지가 강했다. 오늘날엔 활발한 경제활동과 공동주택단지까지 갖췄다. 만연산 자락과 지석강변엔 전원마을이 들어서며 휴양이 함께하는 생활도 가능하게 했다. 그러다보니 대학병원을 기반으로 한 요양시설이 들어서고, 국내 최고의 백신단지에선 연일 연구와 생산을 하며 미래의학을 선도하고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도곡온천이 너무 오랫동안 비어있다. 변화를 시도할 때가 되었다. 스파가 함께하는 주거단지로 탈바꿈시켜보면 어떨까? 이를 도곡 소재지까지 4차로로 연결해서 팽나무와 느티나무 숲길이 이어진 명품 공간으로 가꾸면 좋겠다.

이른 5월에 수림정에서 그리운 얼굴을 회상하며 함께했던 이야기다. 아름다운 사람들, 좋은 시간이었다. 이제 내게서 화순 가는 길은 승용차로 바뀐 지 오래지만 내 마음의 풍경은 여전하다. 언젠가 오른손에 책 몇 권을 끼고서 한번쯤 그 버스를 다시 타보고 싶다. 넓어진 길, 즐비한 아파트, 주유소가 공존해가는 변화를 추억하면서 나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그려봐야겠다.

전동호 전남도 건설교통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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