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시선- 두유 노우 K-장녀?

@김유빈 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 이사 입력 2020.08.11. 11:20

한국의 음악, 영화, 방역 등 여러 가지 상황에 'K-00'을 쓰는 와중에 'K-장녀(케이장녀)' 라는 말이 등장했다. 자칫 우스워 보이는 이 단어가 나는 왜 이렇게 서러운지 모르겠다.

몇 년 전이었다. 한 연예인이 첫째 아이로 딸을 출산했다는 사실에 '살림 밑천 큰딸 출산'을 기사 헤드라인으로 작성한 것을 보았다. 또 그 즈음 이제는 남아보다 여아를 선호한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여아를 선호하는 이유가 귀엽고 애교가 많으며 부모의 노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큰딸을 당연히 살림 밑천으로 표현하고, 여아를 도구화 하는 인식의 기사를 남아선호사상이 바뀌었다고 자랑하는 사회에 충격을 받았다. 기사의 말대로 하자면 딸은 살림 밑천으로 태어나서 자랄 때는 애교가 많고 귀여워야 하며 다 자라서는 부모의 노후 준비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딸은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서 태어나야 하는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 장녀의 위치란 전근대적 가족에 대한 개념과 더불어 여성에게 요구되는 통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작동한다. '화목해 보여야 하는' 가정에 누군가는 어려운 부분, 불만 등을 들어줄 창구가 있어야 하며 그 창구가 장녀임을 의심치 않는다. 여성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을 잘 한다는 통념이 작용한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장녀들에게 가정 내, 친척들 내 불화와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장녀에게 책임감과 죄책감을 학습시킨다. 가정 내 숨은 이야기, 대부분 감정적인 이야기, 들을 장녀에게 건네며 "큰딸인 너니까 믿고 이야기한다" "내가 너 아니면 누구에게 이야기 하겠니" 등 장녀니까 할 수 있는 일들임을 인식시킨다. 해서 장녀로서 가정의 불안정한 일을 듣는 일은 가정의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임으로 학습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회피한다면 스스로 가정이 어려울 때 '이야기 하나' 못 들어주는 잘못된 사람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결국 다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든 감정을 받아낸 장녀의 마음이 어떨지 알고자 하는 이는 없는 것 같다.

감정의 분출구 역할 뿐 만이 아니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장녀는 엄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교육받는다. '엄마가 집에 없으면 네가 엄마야' 장녀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말일 것이다. 이 역시 돌봄을 여성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일과 엮여있다. 엄마가 없는 동안 빨래, 청소 등의 집안일은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동생들 식사, 공부, 생활 전반을 챙겨야 한다. 집안, 동생들을 챙기는 와중 자신을 챙기는 시간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장녀로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와중에는 장남으로서 역할을 부여받기도 한다. 딸만 있는 집안의 큰딸은 아들이 없어서 어쩌냐는 세상의 안쓰러움과 질타에 대응하며 큰딸이자 큰아들이 되어간다. 여담이지만 나는 항상 의문이었다. '아들을 낳는 것'이 '능력'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왜 엄마의 능력만 의심받아야 할까. 아빠의 능력은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걸까.

나는 베이비붐세대인 부모님을 둔, 맞벌이 가정에 남동생이 있는 집안의 장녀로 자랐다. 아빠에겐 큰 아들로 문제 해결사로, 엄마에겐 친구로 큰딸로 중재자로, 두 살 어린 남동생에게 누나이자 형, 미니엄마였다. 재미있게도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장녀인데 우리는 약속을 잡을 때 집안일은 다 끝냈는지, 동생들 밥은 챙겨줬는지 확인하고 약속에 임한다. '우리는' 언제나 되어서 케이장녀로 자조하는 일 없이 그냥 '자식'으로 '나'로 살 수 있을까.

지금 쓴 기고문도 케이장녀에 대한 수치화된 자료를 제시하기 어렵고 일반화의 오류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케이장녀로 자조하며 벌써 추석을 걱정하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서로 힘내라고 다독이는 이 상황이 오늘 기고문의 충분한 사유가 될 것이다. 케이장녀들에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조금 더 돌보도록 노력하자. '착한 딸'이 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져도 되지 않을까. 케이장녀들에게 작은 위로를 전한다. 김유빈 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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