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신석 목사님 영면에 부쳐

@이지현 5·18부상자동지회초대회장·시인·연극인 입력 2021.02.08. 18:20

목사님.., 차마 목이 메어 부를 수도 없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해서, 분통이 터져서 말입니다.

엊그제 장례식장에서 들은 목사님의 일화로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지방 교회에 시무하시던 중 장로님으로부터 "목사가 선교활동을 해야지 2년동안 교도소에 있어야 되겠느냐, 앞으로는 교회에만 충실하라"며 탄핵(?)을 하려 하자 이렇게 답하셨다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라가 어렵고 사회가 병들고 있는데, 어찌 교회에만 메달리겠는가, 앞으로도 소외받는 사람들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

목사님의 삶은 고난의 역경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양심과 광주의 희망을 쌓는 주춧돌이었습니다.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1982년 8월 1일이었습니다. 80년 5월 전두환 군부의 만행으로 부상당해 좌절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휠체어와 수면제로 버티던 부상자들의 손을 잡아주신 분이 바로 당신, 강신석 목사님이셨습니다. 현 (사)5·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의 전신인 5·18 광주의거 부상자회의 탯자리가 무진교회입니다. 무진교회는 항상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정거장이었고 쉼터였으며 사랑방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다정한 이웃이고 벗이었으며 선배였고, 광주의 큰 스승이자어르신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겸손과 성실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95년도가 생각납니다. 전두환 일당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던 그해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전남 공동대책위'(공대위)를 출범시켰죠. 실패하면 또 줄줄이 잡혀들어갈 줄 알기에 선뜻 중책을 맡으려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당신께서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겠다며 상임의장을 수락하셨죠. 그렇게 해서 무등산처럼 묵묵히 100만인 서명운동도 이뤄내셨고 소생의 명동성당 농성투쟁도 가능했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학살자들은 풀려나서 떵떵거리고 사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광주의 민낯이 드러나서 목사님의 지도편달이 절실한데 우리들은 어쩌라고 훌훌 떠나셨습니까? 그래요. 웃으며 보내드려야죠. 그런데 항상 천사 같은 미소로 반가워하던 사모님께서 병원에 계시니, 어찌 기쁨으로 이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슬픔으로 목사님의 하늘여행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금남로에 함성이 울려퍼지고 광주천에 희망이 흐르면, 목사님께서 좋아하신 팥죽을 싸들고 찾아뵙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지켜주셔서 5월 가족은 든든했고, 광주시민은 희망가를 불렀습니다. 목사님과 함께라서 행복했습니다. 목사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이지현(5·18부상자동지회초대회장·시인·연극인)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