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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칼럼] 눈길 산행의 추억

@김홍식 일동중 교장·전 광주서부교육장 입력 2020.12.31. 10:31 수정 2021.01.04. 10:51

무등산이 온통 하얗다. 유난히 파란 하늘과 기분 좋은 대비를 보여준다. 무등산! 눈 뜨면 저절로 다가오고, 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습관처럼 바라보는 일은 이제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가끔 무등산에 얽힌 아련한 추억 속의 사연들까지 소환하면서. 그래서 무등산은 우리에게 산 이상의 '영원한 모성이며 마음의 고향'이다.

그날은 폭설 때문에 도시 전체가 완전히 설국으로 변했다. 도로 사정으로 수업에 늦은 아이들도 꽤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해도 녀석은 5교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자취하는 녀석이라 당시로서는 따로 연락할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수업을 마치고 녀석을 만났다. 충분히 예상했던 녀석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뻔한 자초지종은 묻지 않기로 했다.

"오늘 눈도 오고 했으니 함께 무등산이나 가자." "네? 무등산을요?"

눈이 화등잔 만큼 커지면서 '이렇게 눈이 많이 왔는데 산행은 무슨 산행이냐'고 뜨악해하는 녀석의 표정을 애써 외면하며 작심하고 증심사 방면으로 발길을 이끌었다. 폭설 뒤 산행! 수업하기 위해 출근했던 선생이나 담임의 불같은 호출에 전혀 예상치 못하고 나온 녀석이나 피차 준비 안 되기는 마찬가지. 오늘 녀석에게 단단히 정신 좀 차리게 해야겠다는 생각 하나가 준비라면 준비의 다였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가며 증심사에서 토끼등을 타고 바람재를 거쳐 산장으로 가는 길은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다. 속으로 '저 녀석 때문에 지어서 생고생하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녀석도 '담임 한번 잘못 만났제. 결석했다고 이런 심한 벌을 주다니' 같은 표정인 듯해서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 멋쩍게 웃고 말았다.

눈밭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말을 건넸다. "○○아!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네 엄마가 늘 함께 떠오른단다. 언젠가 학교에 오셨을 때 보았던 흙 묻은 거친 손을 잊을 수가 없어. 그렇게 엄마가 고생하며 뒷바라지하는데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려서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내가 더 화가 난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무 말이 없었다. 보통 때 녀석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붉게 상기된 녀석의 볼 위로 갑자기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손수건을 건네주며 잠시 녀석의 엄마가 가만히 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듯한 상상을 했다. 곧바로 얼어붙어서 잘 닦이지도 않는데 애써 닦는 모습을 보니 '너도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게 있어서 이렇게 흔들리고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자 괜히 나까지 울컥해지면서 짠한 느낌이 가득했다. 이어 말 대신에 그저 눈 부신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주고받았다. 어느 시인이 '아직… 안 밟은 흰 눈'을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 세 가지 중 하나라더니 그날 순백의 눈밭은 단순한 설경(雪景)을 넘어서 지워지지 않는 심화(心화)가 되고 말았다.

어렵게 어렵게 원효지구에 도착했더니 버스는 이미 오래 전에 끊긴 상태였다. 난감했지만 걸어오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허기도 지고 춥기도 하고 정말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산수동 산장 입구에 도착해서 맨 먼저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 들러 따뜻한 오뎅국을 나눠 마셨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몇 시간을 강행군했으니 아무리 젊은 혈기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둘 다 몹시 힘들고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신 뜨거운 국물맛을 지금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훈련 잘 받았다고 3박 4일 특별휴가를 나왔습니다." "아니, 군대 가면 '엄마'라는 말 한마디에도 눈물이 절로 나고, 그래서 휴가를 얻게 되면 집으로 불같이 달려가는데 왜 학교에 먼저 왔어?" "선생님 좀 보고 가려고요. 훈련받으며 선생님 생각 많이 났거든요."

지금은 녀석도 50대다. 그 누구 못지않게 좋은 가정을 이루어 건실한 아빠가 되어 있다.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는 아빠다. "○○아! 너도 벌써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겼구나. 이렇게 함께 나이 들어가는구나. 마치 큰형과 막내동생 사이처럼 말이다. 막 교단에 서서 여러모로 미숙했던 새내기 선생의 지도에도 불구하고 잘 사는 모습 보니 더없이 고맙다. 녀석아! 그래도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었어. 그래, 어떠냐? 눈 내리는 날 포장마차에서 그날 힘들었던 산행 회상하며 소주 한 잔!" 김홍식(일동중 교장·전 광주서부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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