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다
김하라 지음/ 돌베개/ 각권 1만1천원
18세기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로 평가된다.
조선 영조 31년(1755)에 태어나 한양 남대문 근방에 살던 젊은 사대부 유만주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거자(擧子)였다.
서른세 살에 요절하기까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역사서와 소설 등 다양한 책을 읽으며 독서가이자 작가로 살았다.
그가 남긴 유일한 저술은 스무 살이 된 1775년 1월 1일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13년간 성실하게 쓴 일기인 '흠영'(欽英)이다.
가로 22.5㎝, 세로 35.8㎝ 두툼한 공책 24권으로 이뤄진 흠영은 유만주의 생각과 일상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와 풍속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흠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소논문 여러 편을 발표한 김하라 규장각 선임연구원이 흠영 가운데 현대인에게 의미 있는 부분을 모아 엮은 '일기를 쓰다'를 발간했다.
1권에는 책과 지식에 대한 열의가 넘쳤던 유만주의 개인적 면모와 관련된 내용을 수록했고, 2권은 18세기 조선의 면면을 가감 없이 묘사한 글로 구성했다.
유만주의 자호(自號)이기도 한 흠영은 '꽃송이와 같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그는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글은 '흠영'에 있고, 나는 시를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시는 '흠영'에 있으며, 나는 말을 잘 못하지만 나의 말은 '흠영'에 있다"고 적을 만큼 일기에 애착을 보였다.
흠영에는 18세기 서생인 유만주가 좋아하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지도, 역사책, 주렴, 여행, 다래를 자주 거론했고 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만주는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과 어깨를 겨룰 만한 역사가가 되고자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낙방한 사람을 파락호로 여기는 사회 통념에 상처를 입었다.
말년에는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일을 하고, 범부(凡夫)의 마음으로 학자의 일을 하며, 부유(腐儒, 케케묵은 선비)의 식견으로 영웅의 말을 하고, 무뢰(無賴)의식견으로 품격의 말을 한다"며 복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흠영은 평론집이자 기행문이기도 했다.
유만주는 "나라의 기강은 이처럼 시들하고, 풍속은 이처럼 각박하며, 물가는 이처럼 앙등했다"며 살기 힘든 세태를 꼬집었고 "상민과 천민이 공공연히 '양반'이란 글자를 가져다가 서로 방자하게 일컫는 것은 이미 풍속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는 직분도 경제력도 없는 형편이어서 두 발로 여행을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필체로 곳곳을 묘사했다.
남산 봉수대에 올라 뚝섬을 굽어보면서 "강물빛이 몹시 푸르러 마치 바로 눈앞에 마주하는 것 같았다"고 했고, 정릉(貞陵)에서는 "햇빛이 새어드니 몹시도 그윽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고 적었다.
유만주는 부친에게 일기를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다행히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돌베개가 펴내고 있는 '우리고전 100선'의 19, 20번째 책으로 나왔다.
- 대장간에 남아 있는 우리의 모습 "누군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쌓여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된다. 이 책의 귀함과 무게가 거기에 있다."한때 서울 을지로 7가는 대표 대장간 거리였다. 녹번동,수색, 구파발 등지에도 대장간이 많았다. 그랬던 대장간들이 1970∼80년대 급격한 산업구조 개편과 도시개발을 거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이제는 대장간이 모여 있는 곳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대장간 셋이 붙어 있는 인천 도원동이 국내에 마지막 남은 대장간 거리라 할 수 있다.도원역 부근에 있는 인일철공소, 인천철공소, 인해대장간 중 맏형 격은 1938년생 최고령 대장장이 송종화 장인이 운영하는 인일철공소다.책 '대장간 이야기'는 사라져가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장인 대장장이와 대장간의 모든 것을 담았다.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을 누빈다.역사 속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저자는 또 대장간이 우리말의 아주 오랜 곳간임에 틀림 없다고 말한다.이 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에 건넨 선물 중 휴대용 불붙이는 도구 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시를 일컬어 적었던 화금(火金)은 불을 일으키는 쇠라는 말이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는 쇳조각이 부시인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불과 쇠가 합쳐져 이뤄진 말이다.이 책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우리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세계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대장간과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대장간의 인문학적 향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드러내고자 애썼다"고 말하는 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나아가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 속을 누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장간 다섯 곳, 일본의 다네가시마 대장간 한 곳의 현장 모습을 보여준다. 인천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네 곳 등인데, 이제는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 혼자서 일한다. 젊은 누구도 대장간 일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 대장장이들이 일을 그만두면 그 대장간들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저자는 아쉬워한다.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마운 건 이때껏 대장간 현장을 지켜내온 이 땅의 나이 드신 대장장이 장인들이다. 힘에 부칠 때마다 대장간 현장을 찾아 그분들의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고는 했다.대장장이와 도구, 그리고 쇠. 대장간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가 있어야 쇠를 달구고 두들겨서 뭔가를 만들 수 있다. 원자재인 철물이 없어도 대장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나 원재료인 쇠 말고도 화로, 모루, 망치, 집게 같은 필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대장간 일은 쇠를 불에 달구는 작업이 우선이다. 화로에는 풀무가 따라붙는다. 바람이 없으면 화로에 불길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대장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성냥이다. 충청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대장간을 승냥깐이라 한다. 이 승냥이라는 말이 성냥에서 나왔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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