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강진 사의재

입력 2020.03.19. 19:02 김현주 기자
조선의 대학자로···茶山을 일깨운 주모의 죽비소리

인류는 처음에 동굴에서 살다가 움집을 지어 밖으로 나왔다. 움집은 땅에 닿아 질고 습하고 통풍도 불편했다. 그래서 기단을 놓아 집을 지었다. 더 진화한 것이 지표로부터 층을 이루어 지은 집이다. 통칭 다락이다. 높은 곳을 뜻하는 옛 우리말 '달'에서 '다락'이 나왔다고 한다. 다락집은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등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누는 문이 없는, 각은 사면에 문이 달린 다락집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옛집들은 다 다락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락집은 행(行)이 멈추어(止) 만나는 곳이다. 나그네는 가다가 멈추고, 주인은 멈추기 위해 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그곳에서, 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옛 이야기가 시작된다. 편집자주


◆길고 고달픈 18년 남도유배의 시작

다산 정약용은 시를 짓는데 두 가지 어려움을 지적했다. 하나는 자연스러움이다. 둘은 맑으면서 여운이 남는 것이다. 자연스러우려면 작위(作爲)가 없어야 한다. 그것도 어렵고 여운을 남기기는 더더욱 어렵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해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시는 김칫독을 옮기듯이 조심스러운 일이라거나,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것(이성부)이라는 지적이 그렇다. '…저녁 해 고요히 지는 제/ 머언 산(山) 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영랑의 시 '가늘한 내음'의 부분이다. 저물녘 멀리 산허리에 보랏빛이 어리는데 거기에 시인의 마음이 얹혀있다. 그 애잔하고도 맑은 마음이 그림처럼, 읽는 사람에게 전해온다. 강진읍 영랑생가에서 사의재로 가는 길, 햇빛이 빛나고 있다. 햇빛이 빛나지 않고 햇빛이 울고 있을 때 우리는 시인이 된다.

다산이 강진에 온 것은 1801년(순조1). 천주교 박해사건(辛酉敎難)으로 체포되어 지금의 포항에 유배되어 있던 다산은 그해 10월 처조카 황사영의 벽서사건이 일어나 한양으로 압송된다. 거기서 취조를 받고 재차 귀양을 떠나는데 그곳이 강진이다. 길고 고달픈 18년 남도유배의 시작이다. 삭풍이 몰아치는 39세, 그의 겨울이 어떠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울분과 좌절의 나날들, 사람들은 귀양 온 천주교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때 다산은 강진에서의 첫날밤을 묵기 위해 동문 밖 작은 주막(동문매반가)을 찾아간다. 주모가 골방 하나를 내어주고 밥상을 차려준다. 그 절대고독 속에서 주모의 손길은 따뜻했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과거 다산의 적선(積善)이 그렇게 돌아오는 것(餘慶)이라고 나는 믿는다. 얼마나 통음(痛飮)하였을까, 목숨을 끊어버릴 것까지 생각했던 다산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한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할 때, 늙은 주모의 입에서 한 마디가 떨어지니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것이다. 낮으나 깊은, 죽비소리 같은 말씀이다.

다산은 그 소리에 깨어난다. 마음을 다잡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다짐한다. 벌써 1년이 지난 1802년 10월 자신이 편찬한 '아학편'을 교재로 강학을 연다. 첫 제자 황상을 비롯하여 강진 읍에 여섯 제자를 두었다. 이후 고성사 보은산방의 승려 혜장, 목리의 이학래 등과 교유하면서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다. 다시 이듬해(1803) 동짓달 초열흘 다산은 주역을 읽고 나서 이 주막을 '사의재(四宜齋)'로 이름 지었다. 사의는 네 가지 마땅한 것. 생각은 담백해야 하고, 외모는 단정해야 하며, 말은 적어야 하고, 움직임은 무거워야 하는 것. 여유당전서 3권에 이 대목을 기록하고 있다. '마땅하다는 것은 의롭다는 뜻이며 의로 제어함을 이른다. 나이가 많아짐을 생각할 때 학업이 무너져버린 것이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본시 유배는 기약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유배지에서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주색에 빠져 폐인이 되거나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다산인들 어찌 다 놓아버리고 싶은 유혹이 없었을까? 사의는 생각이 잡스럽고, 외모는 흐트러지며, 말이 많아지고, 경거망동하는 자신에 대한 역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므로 의(宜)는 의(義)다. 생각, 외양, 말, 행동의 사의는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사람이 맨 처음 다잡아야 할 수신의 요체들이다. 

사의재

다산은 사의재에서 1805년 겨울까지 4년을 보낸다. 그의 경세에 관한 대표적 저작인 일표이서(一表二書·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가운데 '경세유표'를 이곳에서 저술했다. 또 중학교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한시 '애절양(哀絶陽)'을 썼다. 절양은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것이다. 백성들이 세금을 견디다 못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현실, 그러나 양반 부호들은 풍류나 즐기면서 한 톨의 세금도 내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는 시다. 이 시는 조선후기 썩은 국가의 부조리와 서민의 참담한 정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산은 1808년 사의재를 떠나 강진 귤동의 '다산초당'으로 간다. 그곳에서 천여 권의 책을 쌓아놓고 주석학문인 경학(經學)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818년 다산은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마현으로 돌아간다. 다산의 삶은 크게 넷으로 나눠볼 수 있다. 출생부터 과거를 준비하던 22세까지를 청년기로, 그 이후 3기는 다 18년으로 나누어진다. 1783년 진사시 합격에서 1801년 신유교난까지 18년을 관료의 시기, 1801년부터 해배되는 1818년까지의 18년을 강진의 시기, 1818년 고향으로 돌아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18년을 마현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역시 조선의 대학자로서 다산이라는 꽃이 활짝 핀 것은 강진의 시기가 된다. 다산 스스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르는데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 졌다.

다산은 사회 각 분야의 봉건적 질곡을 타파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론을 자신의 저술로 집대성한 조선후기 대표적 개혁사상가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의 토지개혁을 담은 '전론(田論)'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아래 토지를 사회적 소유로 규정하고,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공산주의적 이론의 전개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양반은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우고 평민은 피지배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 성군의 왕도정치 구현을 위해 창의적이고 강직한 신하의 보필이 필요하다는 주장 등은 군신반상(君臣班常)의 신분철폐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한계가 있다. 개혁이되 혁명은 아니었다.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강진 사의재

◆실의와 좌절 벗어나 방대한 저술 남겨

지금도 매화 산수유가 수줍은 듯 피어있지만 조금 있으면 봄꽃들이 지천에 만개할 것이다. 영랑의 집에는 꽃봉오리가 아이들 얼굴 같이 환한 모란이 피어나겠지, 그 향기를 어이할까. 이 아름다운 봄날에 사의재에 들러 막걸리 한잔 아니 하고 갈 수 없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총 499권의 저작을 남겼다고 정리했다. 실의와 좌절과 울분과 고독의 유배생활 속에서 자신을 인간의 극한한계로 몰아붙이며 이 방대한 저술을 마친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 시작이 사의재이다. 주모의 어머니와 같은 지극한 사랑이 없었던들, 그를 어루만져주던 강진 땅의 그 따사로운 햇살이 없었던들, 어찌 주막 골방에서 4년을 머물렀을 것이며, 어찌 시련을 견디어 조선 최고의 대학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싶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히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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