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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 미나리

@유지호 입력 2021.03.04. 15:40 수정 2021.03.05. 15:08

등굣길 옆 물가엔 손이 잰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2∼3월 꽃샘 추위에도 뻘 밭에 몸을 담근 뒤 빨갛게 언 손을 빠르게 저었다. 진흙 투성이 장화와 얇은 몸빼에선 고단함이 묻어났다. 한 움쿰씩 쥐여진 파란 줄기들은 흙투성이 채로 양동이에 담겼다. 1980년대 국민학교·중학교 다닐 때의 아스라한 장흥 원도리 '미나리꽝(밭)' 풍경이다.

광주 출신의 시인 김승희는 미나리 수확의 고단함을 농주(農酒)의 힘에 빗댔다. "미나리꽝은 차가운 물속에 있고 / 얼음 속에서 맨손으로 일을 하니까 / 팔 어깨가 다 녹는다고 한다 / 술에 취해야만 일할 수 있다 / 술이건 무엇에든 취해서 추운 물속에서 미나리를 키운다."(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 중 '미나리꽝 키우는 시인').

고달픈 직장 생활에선 해장음식으로 이어졌다. 오리탕·생태탕·대구탕·복탕에 빠지지 않았다. 동의보감에선 갈증을 풀어주고, 황달·부인병·음주 후의 두통이나 구토에 효과적이라고 했다. 식이섬유가 풍부한 대표적 알칼리성 채소로 우리 몸의 독성(산성)을 중화시켜 준다.

강인한 생명력이 특징. 병충해에 강한데다 뿌리를 쉽게 내리면서 일가를 키워간다. 낯선 타국 이민자들의 삶과 닮았다. 동명의 영화 '미나리'(Minari)가 전 세계에 이어 국내에서도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 남부 아칸소주 농장으로 옮겨 가 사는 한인 가정의 애환을 다뤘다.

미나리와 이민 사이엔 고달프고 씁쓸한 서민들의 삶이 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엔 미주 이민 이야기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35년간의 처절한 민족 수난사를 상징하는 '징게맹갱외에밋들(전북 김제·만경의 너른들)'에 삶을 의탁했던 우리네 민초들이다. 감골댁 큰아들 방영근은 당시 집안 빚 20원을 갚기 위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간다. 1902∼1905년 호놀룰루행 이민선을 탄 뒤 사탕수수밭에서 일했던 7천200여 명이 현재 미주 이민 1세대들이다.

엄동설한을 버텨 내 살이 부드럽게 오르고 향이 그윽해 지는 3월이 제철이다. 갓 씻은 싱싱한 미나리를 보글보글 끓는 탕에 살짝 데쳐 먹을 땐 연푸른 봄의 단내가 난다. 여러모로 쌉싸름하고 아삭한 그 식감이 그리운 날이다.

유지호 디지털미디어부장 겸 뉴스룸센터장 hwaone@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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