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13. 우리나라 해양신앙의 기원, 남해신사(南海神祠)(上)

입력 2020.01.06. 13:04 김승용 기자
고려 초부터 국가가 해신제 주관한 유일의 해신당
남해 해신제

1998년 목포대 박굴관이

남해신사 터를 발굴할 때,

상단은 묘당, 하단은 대기 장소로

추정되는 상, 하 두 단의

신사 내부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해신당의 유구가 확인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또한 의미가 있다

남해신사가 죽막동 유적이나

일본의 오키노시마 유적처럼

4세기 무렵에 이미 존재해 있었고,

해신당의 발전 과정이 밝혀진다면

충분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지금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마한 특별법은 영산강 유역의 고대 문화를 체계적으로 발굴·조사·연구를 통해 한국고대사의 원형을 이룬 마한문화를 복원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전라도의 정체성의 특질을 찾고, 영암 시종·나주 반남 등 마한 왕국의 중심지에 일본의 요시노가리(吉野ヶ里) 공원과 같은 마한 역사공원을 조성하여 지역 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데 또 다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때 마한문화의 특질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흔히 ‘마한문화’=‘고분문화’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마한문화를 특징지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하다. 광주 신창동에서 확인된 칠기 문화, 영산강 유역의 ‘玉’ 문화처럼 마한문화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더불어 마한의 해양신앙도 고대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해양신앙은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마한문화를 창조한 이 지역의 문화의 특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일본에서는 오키노시마(沖ノ島) 해양 제사 유적을 체계적으로 복원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자극받아 전라북도에서는 부안군 변산반도에 있는 해신당 ‘수성당’ 유적지를 세계유산으로 지정케 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영암군 시종면에 있는 마한 역사 문화공원 내에 있는 ‘남해신사’가 주목된다. 지금도 10월에 열리는 마한 축제는 그곳 신당에서 해신제를 올리면서 시작하고 있다. 해신제가 마한과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남해포에 있는 남해신사는 마한과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남해신사 입구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남해신사는 고려 현종 때 처음 만들어졌다 한다. 고대 마한 역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셈이다. 마한 역사공원 조성과 남해신사가 직접적인 관련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해신사와 마한의 관련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마한 역사문화 공원 조성의 중요한 명분도 되기 때문이다.

영암 시종·나주 반남 지역이 마한 심장부 역할을 하였던 것은 영산 지중해 입구에 위치한다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영암 시종의 남해포는 마한 시대부터 중국, 가야, 왜, 심지어 신라 등 여러 나라 선박들이 드나드는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이었다. 영산강 하굿둑이 건설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목포에서 이곳을 종점으로 하여 여객선이 다녔고, 둑이 생겨 항구의 기능이 축소되었음에도 1982년 당시 통계를 보면 어산 34척 수산물 어획고가 32만톤에 달할 정도로 항구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다. 마한의 국제 무역 중심지로 번창하였던 남해포구의 위상을 상상할 수 있다.

남해포와 구림의 상대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암 월출산에 제를 지내는 터가 확인되었는데 해양신앙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배가 드나드는 포구 입구에 해신당이 세워져 있을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금은 내륙으로 변한 남해포구에 세워져 있는 ‘남해신사’는 이러한 해양신앙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도 ‘수성당’이라는 제각이 있어 해신제를 올리고 있는 전북 부안 변산반도 해안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 죽막동 제사 유적은 이러한 해양신앙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1992년 발굴 조사된 죽막동 유적지에서 4, 5세기 마한 시대에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선박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였던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비록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3세기∼6세기 중국 남조 계통의 도자기, 5∼6세기 제물로 쓰인 토마(土馬), 대가야계 금속 공예품, 구연부에 돌대를 두르는 영산강 유역의 단경호 등 유물들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중국, 가야, 백제, 심지어 왜 선박들이 항해하는 주요 항로였다고 하는 것을 알겠다. 죽막동 신당은, 이 해역을 항해하던 각국 선박들이 이곳 신당에 들러 무사 항해를 기원하였던 곳이다.

죽막동 해양제사 유적지 발굴 조사를 통해 제의가 4세기 중반에는 토기를 중심으로 노천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다 5세기 전반에 이르러 공헌용의 석제 모조품을 가지고 제사를 지낸 데 이어, 5세기 후반에 큰 옹기 안에 마구나 무기, 거울 등을 넣어 봉헌하는 의식으로 점차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은 비록 소량이 출토되기는 하나 출토 유물로 보아 토기 중심의 제사가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국시대와 같은 노천제사를 벗어나 건물 내에서 제사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도 기와가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 내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제기만 백자로 바꾸어졌을 뿐 제사 양상은 고려시대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있는 죽막동의 수성당제는 19세기 중반부터 수성당이라는 독립된 제당을 갖고 제사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부안 죽막동 유적은 현재 확인되는 유물만으로도, 4세기 이후 해양제사 양상의 변천 모습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해양 유산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곧 마한 시대 이래 해양 제사 유적임을 말해주고 있다. 일부에서는 죽막동 유적을 백제의 해양 제사 유적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나 4세기 무렵이면 전북 지역은 아직 마한의 영역에 해당하므로 마한 시대의 해양 제사 유적이라고 설명하여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마한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남해신사 역시 이러한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남해신사는 고려 초에 이미 국가가 해신제를 주관한 유일의 해신당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98년 목포대 박굴관이 남해신사 터를 발굴할 때, 상단은 묘당, 하단은 대기 장소로 추정되는 상, 하 두 단의 신사 내부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해신당의 유구가 확인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또한 의미가 있다. 죽막동 유적에서는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고, 남해신사와 더불어 3대 해신당이라 일컬어지는 양양의 동해묘 또한 현재 복원되어 있기는 하나 구체적인 유구는 찾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남해신사가 죽막동 유적이나 일본의 오키노시마 유적처럼 4세기 무렵에 이미 존재해 있었고, 해신당의 발전 과정이 밝혀진다면 충분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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