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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백제 멸망에도 마한의 정체성은 강고하게 유지됐다

입력 2020.10.12. 11:17 수정 2020.10.12. 20:04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Ⅱ<6>고유한 정체성
서로 경쟁하면서도 먼저 양보
금은 보다 옥을 더 귀히 여김
마한지역의 고유 문화적 특질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통치기구 중 마한도독부 존재
'백제, 옛 마한 속국' 의식 반영
부여융 묘(중국낙양)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 지역의 고유한 문화특질은, 용맹한 마한 사람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먼저 양보하였고, 금은보다 옥을 사랑하였다는 이 지역의 정체성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독특한 정체성은 분립 상태에 있으면서도 상호 공존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 비록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발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백제와 대등한 단계에서 통합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그 정체성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백제 멸망 당시에도 마한 정체성은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융의 묘지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663년 백강 전투 때 당군과 함께 참여한 융은 웅진도독에 임명되어 옛 백제 지역 관할 책임을 맡았다. 당의 이이제이 정책에 이용된 셈이다.


그의 묘지석 가운데 '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가 이리와 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요해 바닷가에서 올빼미처럼 폭력을 펼쳤으며 환산 지역에서 개미 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에 황제가 크게 노하여 천자의 병사가 위엄을 발하였으니' 라는 구절이 있다.

'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가 폭력을 펼쳤으며'라는 구절은 백제 부흥 운동을 말하는 것이고, '환산에서 개미 떼처럼 세력을 규합했다'라는 구절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 부흥 운동을 가리켜 융이'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라는 표현한 것은 그가 도독으로 통치하는 것에 대해 유독 마한 출신의 거부감이 컸음을 말해준다.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저항이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 아들 부여융 묘지석 中


당은 백제를 멸한 후, 처음에는 웅진·마한·동명·금연 등 다섯 도독부를 설치하였다가 나중에는 웅진도독부 하나만 남겨 두었다. 5도독부 체제를 1도독부 체제로 전환한 것은, 백제를 멸한 후 행정 조직 정비를 통해 이 지역을 영속 지배하려는 당의 노력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백제 지역의 저항과 신라의 견제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이 5도독부를 설치하고 다시 1도독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백제 멸망 후의 옛 마한 중심지인 영산 지중해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다섯 도독부의 명칭이 관심을 끈다. 웅진도독부는 백제의 옛 서울이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되지만 '동명'과 '마한'을 도독부 명칭으로 사용한 데서 정치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동명은 고구려와 백제 등 부여계에서 시조로 추앙하기 때문에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당의 입장에서 충분히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마한을 굳이 도독부 명칭으로 사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7세기 백제의 마한 인식이 당의 백제 지배 기구 명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7세기에 나온 '주서(周書)'나 '북사(北史)' 그리고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에 백제를 "예전 마한의 속국"이었으며 "마한의 옛 땅에 있었다"고 나와 있다. 또 다른 중국 사서인 '한원(翰苑)'에도 백제가 옛 마한 땅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세기 중국에서는 마한을 한반도 남부의 중심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를 가지고 마한의 역사적 정통이 백제로 계승됐다고 이해하기도 하지만, 무왕의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오히려 백제가 마한의 정통을 이었다고 살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당에서는 당시 백제 정치 세력이 왕족인 부여계와 새로이 지배세력으로 편입된 마한계로 양분된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부여계보다 마한계가 백제의 정치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살피고 있었다.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이들 마한계에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방향 설정은 백제 멸망 이후 피정복지 정책 수립에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당은 현실적인 힘을 지닌 마한과의 관계 설정을 맨 먼저 고려해야 했을 것이다. '마한'이라는 도독부 명칭이 나온 배경이라 하겠어요.

당이 마한 도독부를 설치하려 하였을 때 그 위치에 대해 전북 지역 설도 있지만, 필자는 영산강 유역에 있다고 본다.

당의 '마한' 명칭 사용이 마한계에 대한 정복지 정책과 관련이 있다면 당연히 그 중심지인 영산 지중해 지역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당이 도독부와 더불어 설치한 7개의 주 가운데 노령 이남의 전남 지역에 대방주와 분차주 등 두 곳이나 두었던 것도 이러한 관심의 반영이었다.

분차주는 보성 복내 지역에 주 치소가 있었고, 나주 다시 복암리 지역에 대방주의 주 치소가 있었다. 시종과 반남·나주·다시 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영산 지중해의 마한 세력은, 백제와 통합되는 시점에 점차 복암리 세력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었다. 당이 이곳에 치소를 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역적 연고도 전혀 없는 한의 군현 대방군을 영산 지중해 지역 통치조직 명칭으로 당이 빌린 것은 이 지역에 강하게 뿌리내려져 있는 마한의 정체성을 누르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마한 도독부를 두려 한 이 지역에 정책 변화가 온 것이다. 이 지역을 보다 확고하게 지배하고자 하는 당의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백제 멸망 무렵까지도 마한 정체성이 여전히 강고하게 뿌리내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마한-백제 인식을 마한-고구려로 역사 인식을 바꾸려고 하는 데서도 이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은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의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마한-백제의 역사 인식을 최치원이 모를 리 없다. 따라서 마한을 고구려로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은 통일신라 시대에 새롭게 형성된 인식의 반영이라 하겠다.

'일통삼한', 삼한을 통일하였다는 인식을 가진 신라는 삼한과 삼국의 대응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했다. 삼한 중 가장 강성했던 세력은 마한이었고, 중국 사서에도 신라에 복속된 백제를 여전히 '마한의 옛 땅'이라고 인식되고 있었다.

백제 멸망 이후에도 계속되는 이러한 '마한-백제'의 역사 인식 체계는 신라에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672년 백제 영역에서 신라에 축출되어 요동 일대로 옮긴 이후에도 웅진 도독부의 백제 관리들은 여전히 백제 땅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라는 일통에 대한 새로운 역사 인식의 정립이 필요했으며 또한 웅진 도독부의 백제 관리들의 마한·백제와의 관계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백제 유민들에게 마한 역사 계승 인식은 여전히 '마한의 옛 땅'으로 지칭되는 백제 땅으로의 회귀를 의미하였다.

신라는 기존 중국 측에서 인식하고 있던 마한-백제 인식이 아닌 새로운 마한-고구려 인식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성공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시민전문기자(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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