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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마한인들 금·은보다 귀히 여긴 구슬, 옷에 달았다

입력 2020.09.13. 17:11 수정 2020.10.19. 09:26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Ⅱ<5>유물로 본 마한
영암 시종 옥야리·신연리·내동리 등
영산강유역 모든 고분서 구슬 발견
나주 정촌고분서 1천여점 구슬 출토
복암리고분 출토된 소·말뼈로 미뤄
마한사회에 '순장 풍습' 사실로 추정
전형적 '후장' 대표 장례문화 엿봐
반남고분군

마한 남부 연맹이 마한의 원뿌리임을 여러 차례 이야기 하였다. 이를 문헌을 통해서도 살폈지만. 이를 입증하는 유물들이 적잖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 옹관과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들 유물과 더불어 '영산강식 토기', '玉', '응' 명문이 있는 녹유탁잔, 복장 풍습을 알려주는 파리 유충 등이야말로 문헌에 나오는 마한의 특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는 점에서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한 관련 발굴 보고서를 검토하다 보면 '玉(구슬)'이 대부분 고분 또는 일반 주거지 유적에서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암 시종 옥야리·신연리·내동리 등 영산강 유역의 모든 고분에서 玉이 대량 확인되고 있다. 최근 금동신발이 출토되어 많은 사람들을 깜작 놀라게 한 복암리 정촌 고분의 한 석실에서는 무려 1천117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구슬이 출토되었다.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구슬이 대거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성강 중류 지역에 위치한 보성 석평 유적에서도 구슬과 다량의 수정이 출토되었는데, 수정을 가공한 공장유구까지 발견되고 있다. 마한 지역에 '옥'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중에는 '(그 나라 사람들은) 구슬을 재보(財寶)로 삼아 옷에 매달아 장식을 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지만, 금·은과 비단·자수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以纓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懸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 기사는 '한(韓)' 지역 사람들은 구슬을 보물로 여겨 옷에 매달아 장식을 하거나 목걸이, 귀걸이로 이용하고, 금은(金銀) 비단·자수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유명한 사료이다. 여기서 말한 '한(韓)'을 대체로 '삼한'으로 해석하여 삼한 사회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 '진서(晉書)' 열전의 '마한'조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삼한 중에서도 '마한' 지역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을 보면, 마한은 '장례를 치를 때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 우마(牛馬)를 탈 줄 모르고 장례를 치를 때에만 우마를 쓴다(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라 하였다. 마한의 장례와 관련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마한 사람들이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는 기록은 광주 신창동 유적의 출토 수레바퀴 유물을 통해서 이미 사실과 다름이 확인이 되었다.

고흥방사 유적 출토 모자곡옥

따라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마한은 장례를 치를 때에만 소나 말을 썼다'는 표현은 사람 대신 소, 말을 순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위지 동이전 원문의 정확한 뜻은 '소, 말을 장례 치를 때에만 썼다'라고 하여 순장과 관련한 언급이 없어, 그것이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이용된 것인지, 아니면 순장 대용으로 희생(犧牲)으로 이용하여 같이 봉분에 들어간 것인지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백제는 주로 사슴을 희생으로 사용하였다. 만약 소나 말을 마한에서 그것으로 사용하였다면 두 지역의 문화적 차이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 기나이(畿內) 지방을 중심으로 소나 말을 참수하여 봉분에 넣은 형태의 제의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여 '한신(韓神)'으로 불렸다 한다.

곧 소나 말이 사람 대신 순장 대용으로 봉분에 묻혔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죽막동 유적에서 사람 모양의 토우와 더불어 토제마(土製馬)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말을 순장 대용으로 사용하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곧 마한 지역에서 소·말을 제사 때 사용되는 제물이라기보다 희생(犧牲)으로 하여 봉분에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당시 마한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중국 측 기록에 역사적인 사실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나주 복암리 1호분에서 소뼈 1개체분이, 복암리 3호분에서 말뼈가 출토됐다.

특히 복암리 2호분의 동쪽 주구에서 소뼈 1개체분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형태의 동물 뼈가 발견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4~5m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말뼈로 추정되는 동물 뼈가 심하게 부식된 채 출토되었다. 특히 주구 동쪽 부분에서 발굴된 동물 뼈 가운데 소뼈로 추정된 뼈의 경우, 긴 목을 꺾어 동쪽으로 틀어놓았고, 네 다리는 함께 묶어 놓았던 듯 가운데로 가지런히 모아 있었다. 말하자면 단순히 제물로 사용하고 버렸다면 여러 동강이로 분리되어 있어야 옳을 것이지만, 이렇듯 1개체가 목까지 꺾어져 있는 상태로 온전하게 발견된 것은, 순장용으로 바쳐진 '희생'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즉, 복암리 고분의 출토 소·말뼈 유물들은 장례 치를 때 제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순장용'으로 사용된 '희생'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은, 마한 사회에서 소나 말을 순장 대용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순장 풍습은 전형적인 '후장(厚葬)'에 해당하는 것이다. '복장' 즉 '빈장' 또한 '후장' 장례 풍속의 대표적인 예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부여의 풍속에 장례를 5개월이나 멈추었는데 이를 영화롭게 여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장례를 멈추었다'는 의미는 사람이 죽어 염습을 마쳤지만,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곧, 부여에서는 여름에 시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얼음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사람이 죽으면 바로 매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하되 겨우 형체가 덮일 만큼 묻었다가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하였다'는 동옥저의 사례와 같이 1차장인 가매장을 한 다음에 본장(本葬), 곧 복장(複葬)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 최초의 율령인 태시율령(泰始律令)의 상장령에,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일단 실내에 매장하여 일정기간 지난 후 야외로 이장하는 구조, 즉 복장 구조를 하고 있는데 천자는 7일 만에 빈을 한 후 7개월 만에 장사를 치르고, 제후는 5일 만에 빈을 하고 5개월 만에 장사를 치렀으며, 선비는 3일 만에 빈하고 3개월 후에 본장을 치른다고 나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신분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으나, 이를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하여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나주 정촌 고분에서 빈장이 최소 7일 이상 행해졌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고분 주인공이 적어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연맹왕국의 국왕이라는 사실을 반영해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영산 지중해 일대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이 문헌에 나오는 마한 사회의 성격을 설명하는 유용한 근거임을 알 수 있겠다. 문헌에 보이는 마한 사회의 모습은 곧 영산 지중해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마한의 중심지이자 마한 문화의 발원지가 영산 지중해 지역임이 분명하다.

박해현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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