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나무가 싹이 틀 때 태어난 포루투갈의 목소리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가장 중요한 건
그냥 파두를
느끼는 거예요
파두는
부르라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냥 생겨난 거지요.
설명하거나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느끼세요“
노래나 음악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정열적인 목소리와 호소력이 있었고
그녀 덕분에 과일을 많이 팔게 된
상인들에게 받은 성과급은
가난에 찌들은 그녀 가계 경제에
그나마 많은 보탬이 되었다
과일 가게에서 노래 부르던
이 작고 갸날픈 소녀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목소리로
성장하게 되리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잊으려면 생각하고/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한용운의 님을 잊고저 중에서)
잊으려고 노력하면 절대로 잊히지 않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로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뼈에 사무치는 그런 마음일 것이다. 이런 마음과 가장 비슷한 것이 서양의 Saudade (사우다데) 일 것 같다.
이런 아련함, 그리움, 슬픔, 한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포르투갈의 파두라고 생각한다. 파두는 라틴어 Fatum, 숙명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파두는 부르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생겨난 것”이라고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말했고 또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들이 결코 마주하고 싸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파두의 존재 의미이다. 왜 라고 물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묻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파두 속에 있다.“고.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운명처럼 숙명처럼 애쓰고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절대 안 되는 것이 있다. 절대로 안될 것 같은 일이 갑자기 이유 없이 갑자기 이뤄지기도 한다. 그리고 열심히 뒤도 보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불치병은 왜 그런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인가, 왜 사고는 갑자기 준비 없이 일어나는가? 아무도 그 끝과 시작, 앞으로 다가올 미래와 내가 살아온 과거의 깊이를 가늠도 추측도 할 수 없다. 그저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살아 있으므로.
가끔 아리랑이 들리면 이유 없이 코끝이 시큰하면서 눈물이 났다. 외국에서 공부 할 때도 공부가 풀리지 않거나 아이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리랑을 들었다. 내겐 아리랑이 격려였고 칭찬이었고 질책이었고 화이팅이었다. 파두를 들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다.
원래 파두는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문화에 그 뿌리가 있다.
파두는 15세기부터 16세기 향수병을 앓는 선원들에 의해 처음 불리기 시작했다. 고전적인 포르투갈의 시에서 따온 가사가 많았고 파두는 블루스와 오페라의 중간쯤이라고 일컬어졌다. 공연은 12줄이 달린 만도린처럼 생긴 독특한 포르투갈의 기타 연주와 함께 이뤄졌다.
비밥은 찰리 파커, 파두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라 한다.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1920년 7월에 태어났다. 태어난 정확한 날짜에 대한 것은 의견이 분분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말리아에게 체리 나무가 꽃을 피울 때 태어났다고 했다. 아말리아는 7월 1일을 그녀 생일로 정했고 살아 있는 내내 그날을 생일로 기념했다.
아말리아의 아버지는 가난에서 탈피하려 포르투갈의 북쪽 산악지역인 베이라에서 리스본으로이주했던 음악가였다. 이때 아말리아를 낳았다. 아말리아는 아홉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다시 베이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말리아는 겨우 생후 14개월에 그녀의 조부모에게 맡겨졌다. 이때 당시 포르투갈은 국민 90%이상이 빈곤함과 싸워야 했다. 이때의 포르투갈은 인구 오백만의 가난하고 낙후된 시골 나라였고 문맹율이 70%나 되는 가난한 나라였다.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말리아는 학교 가는 것을 엄청 좋아했고 친구들은 그녀를 ”모든 것을 다 아는“ 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학교 생활은 초등학교를 끝으로 그만둬야 했다.
처음에는 차비도 나오지 않는 옷 공장에서 하루 종일 옷 다리는 일을 했고 후에는 제과점을 하는 친척을 도와 공장에서 사탕이나 초콜렛을 만드는 일을 했다. 아말리아는 딱히 가지고 놀 장난감 하나 없었지만 혼자서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그리하여 이 어린 소녀는 이미 한 두 곡 정도는 훌륭히 부를 줄 알았고 동네 사람들은 아말리아에게 노래를 시키곤 동전이나 사탕을 주기도 했다. 이 작은 아이가 노래를 부르면 지나가는 사람 여섯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가 과일 상인들을 위한 호객 행위로 노래를 부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노래나 음악을 따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아말리아는 어린 나이임에도 정열적인 목소리와 호소력이 있었고 그녀 덕분에 과일을 많이 팔게 된 상인들에게 받은 나름의 성과급은 가난에 찌들은 그녀 가계 경제에 그나마 많은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과일 가게에서 노래 부르던 이 작고 갸날픈 소녀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목소리로 성장하게 되리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사진2 아말리아와 동생 셀레스테 로드리게스
1938년 아말리아 나이 18살 리스본 지역 축제 중 하나인 노래 대회에 나가 상을 받게 되면서 그녀의 가수로써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후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하고 포르투갈에서 살라자르가 독재를 시작하면서 파두는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됐다. 이때부터 리스본에서는 서민들을 위한 곳이 아닌 좀더 구매력이 있는 부르주아들을 위한 파두 하우스인 솔라 다 알레그리아 (Solar da Alegria), 레티로 다 세베라(Retiro da Severa), 루소(Luso) 같은 곳들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아말리아는 검은 드레스에 검은 숄을 두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 의상은 곧 아말리아와 파두를 대표하는 의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아말리아는 기타리스트였던 프란시스코 크루즈와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23살 때 이혼을 경험하게 된다.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그녀는 파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말리아가 부르는 파두는 어느 누구에게나 호소력이 있었다. 아말리아는 이때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냥 파두를 느끼는 거예요. 파두는 부르라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냥 생겨난 거지요. 설명하거나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느끼세요.“ 이 당시 아말리아는 파두만 부른 것이 아니었다. 파소도블레나 탱고, 삼바나 왈츠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1943년 포르투갈 대사의 초청으로 마드리드에서 첫 해외 데뷔를 했고 이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를 시작으로 그녀의 해외 공연이 시작되었다. 1944년에는 브라질 공연을 떠났다. 원래는 6주를 예정하고 떠났는데 3달로 체류기간을 늘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의 첫 앨범 녹음이 이뤄졌다.
1945년 나치가 대패했다. 살라자르의 독재 정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민주주의를 위한 움직임들이 조성되면서 살라자르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인지도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아말리아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한 여자라며 이런 자리를 무척이나 불편하고 심지어는 불쾌해했다. 이 때문에 아말리아가 우울증 치료까지 받았다고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온갖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는데 실제로 아말리아는 엔지니어였던 세자르 세브라와 결혼한 후 36년간을 서로 사랑하며 잘 살았었다. 그리고 아말리아 죽기 2년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죽음에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1950년 유럽 경제가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을 때 유럽 경제 재건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고 이것이 그 유명한 마샬 플랜이었다. 이때에 모인 자리에 인지도가 있었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다른 가수들은 심포니 오케스트라과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아말리아는 두 명의 포르투갈 전통 기타를 연주하는 연주자들만 동반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 아말리아는 사시나무 떨듯 심하게 떨었다. 마치 거대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장중함에 눌려있는 무명의 세 음악가로만 보였다. 그녀가 무대로 들어섰을 때 누가 봐도 너무너무 겁에 질려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말리아는 이렇게 기억했다. ‘노래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관중들은 마치 내편인 것 같았다고’.
그녀의 공연은 대 성공이었고 그녀가 무대를 떠날 때 아말리아의 얼굴은 웃음과 눈물이 범벅져 있었다.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모든 팬들은 그녀를 둘러 쌓고 ”당신의 공연은 성공인데 왜 우시나요?“를 연발했다고. 그녀는 계속해서 울다가 웃다가를 연발했다. 원래 파두는 하층민들이 했던 하류 문화라는 인식이 있어서 두려웠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날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녀 이름과 함께 브라보를 외쳤다. 이것이 바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와 파두가 가진 힘인 것이다.
포르투갈로 돌아와서 아말리아는 너무나 단조로웠던 기존의 파두에 좀더 복합적인 음악적 구조를 갖춘 새로운 형태의 파두를 시도했다. 그녀의 전통적인 기존의 레퍼토리를 새로운 터치로 재 해석해서 노래를 불렀다. 모든 경계와 문화적 편견을 뛰어넘어 도시적인 것과 향토적인 느낌을 잘 어우러지도록 했고 그녀의 독특한 목소리 색깔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이면서 음악적인 감수정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노래할 때 난 나 자신을 들어요. 그리고 내가 내 자신을 들을 때 결국 울음으로 끝나죠. 아말리아의 곡 검은 돛배, 어두운 숙명, 신이여 용서하소서, 두개의 빛, 난파선, 갈매기, 눈물 같은 음악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드라마의 삽입곡으로 사용돼었고 월드뮤직의 고전처럼 사람들의 뇌리에 인식되었다.
아말리아는 시장에서 제과점에서 이웃들이나 사람들이 만나는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그녀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길 바랬다. 1990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리스본 전체가 울었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대통령은 그녀를 국장으로 장례를 진행했다. 사람들이 손에 하얀 데이지를 들고 전 세계를 울린 포르투갈의 목소리 아말리아에게 안녕을 고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어떤 이들은 그 마지막 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어떤 이들은 그 자리에 엎드려 떠나가는 아말리아를 향해 울면서 입을 맞췄다. 어떤 청년은 자신은 파두를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아말리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고 그녀를 애도하며 말했다. 신의 현존함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을 믿는다던 아말리아는 이제 신 안에서 평화를 찾게 되었다. 어린 시절 고단하게 돈을 벌던 인생이었지만 단 한번도 인생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헛헛하고 힘이 들 땐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Barco Negro)를 들어보자. 우리에겐 적어도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함께 울어줄 친구가 있으니까.
김세경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회의를 전공하고 대학에서 문화강의 교수로 활동했다. 월드뮤직 애호가이자 전문가로 지역방송에서 대중에게 월드뮤직을 소개하는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호주에서 아트앤 인테리어 데코레이션 공부를 한후 지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신진작가들과 외국인 화가들을 후원하는 전시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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