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고 속에서 펜도 없이 생각해 낸 ‘저항의 정신’
황석영·전용호·김종률 82년 노랫가사로 작곡
지금은 아시아 10여개 이상서 번안돼 불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혹독한 고문으로 80㎏에 달하는 몸무게가 40㎏으로 줄어들 만큼 쇠약해진 몸으로, 피와 배설물로 엉망진창인 감옥 속에서 펜 한자루 없이 정신력만으로 빚어낸 시 '묏비나리'가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되어 전 세계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15일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88세의 나이로 별세하면서 그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인연이 다시 관심을 받는다.
백 소장의 '묏비나리'는 어떻게 '임을 위한 행진곡'이 됐을까.
황석영, 김종률씨와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극을 만들었던 전용호(64) 작가에 따르면 이들은 엄혹했던 1982년 3월, 운암동의 황석영씨 집에 모여 5·18을 전국에 알리는 노래를 만들고자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한 달 전인 2월20일 망월동에서 열린 윤상원, 박기순 열사의 영혼 결혼식에 주목했다.
노래가사로 쓰기 위해 참고한 20여권의 시집 중, 백 소장의 시집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속에 '묏비나리'가 담겼었다.
묏비나리는 감옥에서 만들어진 시였다. 1979년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한 민주화 집회를 개최한 백 소장은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온갖 고문으로 고통을 받는 와중에도, 온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배설물이 흥건한 옥사 안에서 백 소장은 감옥 천장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수백 번씩 '묏비나리'를 생각했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감옥에서 접했지만, 그때는 그저 광주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정도로만 알았다고 한다. 비로소 감옥에서 나와 머릿속에 담아둔 시를 1981년 책으로 펴냈다.
'묏비나리'를 읽은 황석영과 전용호, 김종률은 단숨에 노래 가사로 만들고, 작곡을 했다. 황석영의 집에서 커튼을 치고 당시 MBC 입사를 앞뒀던 전남대생 오정묵이 노래를 불렀다.
녹음된 테이프는 2천개로 복사돼 전국에 퍼졌다. 억압된 투쟁심이 불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듬해인 2월 대구 기독교 예장 청년대회에서 백 소장은 자신이 쓴 '묏비나리'가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지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전 작가는 "1982년 당시 광주는 어디를 가도 슬픔이 깃든 그런 도시였다. 그 고통과 슬픔을 승화하는 노래 가사로 이만한 글이 없었다"며 "마치 윤상원 열사가 5월27일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을 지킨 심정이 담겨 있었다. 묏비나리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돼 전국에 광주를, 5·18을 알렸다"고 말했다.
감옥에서 만들어진 '묏비나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되어 지금은 아시아 10여개 이상 국가에서 자국어로 번안돼 민주화투쟁 현장에서 불리고 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집회 때에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렸다.
백 소장은 또한 일평생 민주화에 투신한 투사이자 예술가였다. 그는 1932년 황해도 은율군 구월산 자락에서 태어나 1964년 한일협정 반대 투쟁에 투신했다. 1979년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인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구속 수감돼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풀려났다.
1984년 백범사상연구소를 해체하고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해 현재까지 소장을 맡아왔다. 1987년 6월 항쟁에서는 시민 대표로 연설했고, 12월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했다. 2016년~2018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때에는 매회 참여했으며 저서로는 '젊은 날' '이제 때가 왔다' 등 시집과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항일민족론' 등 수필집이 있다.
백 소장의 장례는 5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마련한 '사회장'으로 엄수됐으며 19일 오전 8시 발인을 통해 서울 모란공원에 안장된다.
광주시민사회와 지역 정치권 역시 모진 억압에도 민주화와 인권에 헌신한 고인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서충섭기자 zorba85@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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