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충효동 출신… 노모부양에 거병 삼가
25세 때 담양서 격문 돌리고 의병에 나서
충장로를 간다. 충장로는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이름 지어진 거리이다. 금남로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거리라면, 충장로는 원통하게 옥사한 김덕령의 한이 서린 곳이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 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연기)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 김덕령의 춘산곡
1187번 시내버스를 타고 무등산 중턱에 있는 충장사를 간다. 홍살문을 지나 충장사를 들어가면서 안내판을 본다. 안내판에는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사우 및 묘역이다”라고 적혀 있다. 외삼문인 충용문을 지나니 익호문이다.
충용문은 선조가 김덕령 부대에게 내린 군호 충용군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익호는 범에 날개가 났다는 뜻인데 세자 광해군이 내린 군호에서 유래한 듯하다.
이어서 사당 앞에 선다. 충장사 사당에는 칼을 집고 앉아 있는 김덕령 장군의 영정이 있다. 영정 앞에서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하였다. 그리고 의병장 김덕령에 대하여 생각한다.#그림1왼쪽#
충장공 김덕령(金德齡 1568-1596). 그는 1594년 26세의 나이에 팔도 의병 총사령관이 되어 28살에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원통하게 옥사한 비운의 의병장이다.
김덕령은 1568년 12월에 광주 석처촌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아버지 김붕변과 어머니 반씨의 3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에 작은 할아버지이고 환벽당 주인인 사촌 김윤제에게 공부를 배웠고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용력이 뛰어 났다.
'연려실기술'에서 표현한 김덕령이다.
'김덕령은 광주 석저촌(石底村) 사람이다. 용맹과 힘이 뛰어나서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 잡아서 그 고기를 찢어서 모두 먹기도 하고, 말을 타고 달려서 작은 창문으로 한 칸 방에 들어갔다가 곧 말을 돌려서 뛰어 나오기도 하며, 누각 지붕 위에 올라가서 옆으로 누워 굴러서 처마를 타고 떨어져서 누각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일찍이 대숲 속에 사나운 범이 있다는 말을 듣고 활과 창을 가지고 가서 박두(樸頭, 고두리살)로 먼저 쏘니 범이 입을 벌리고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덕령이 창을 뽑아 대적하니 창날이 범의 턱 아래로 나와서 땅에 박히므로 범은 꼬리만 흔들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김덕령은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18세에 담양에 사는 이씨와 결혼을 하였다. 20세에는 형 김덕홍(金德弘, 1558-1592),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혼은 송강 정철과 절친한 친구인데 그는 광주에서 선비들에게 강학한 적이 있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 의병에 가담하였다. 고경명 부대가 전주에 이르렀을 때 형 덕홍은 덕령에게 말하기를,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아우 덕보만 혼자 있으니 우리 형제가 모두 나선다면 어머님을 모실 사람이 없게 된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죽을 것이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여라” 하였다.
김덕홍 입장으로서는 막내 동생 덕보(德普, 1571-1627)에게만 모친을 모시라고 하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김덕령은 형의 권고에 따라 광주로 귀향하였다. 그런데 김덕홍은 7월10일 금산전투에서 고경명과 함께 순절한다.
1593년 6월말에 진주성을 지키던 호남 의병장 김천일과 최경회, 고종후 등이 순절하자 호남사람들은 다시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다시 화순에서 최경회의 형 최경장이 중심이 되어 계의병이 일어났다.
8월에 어머니 반씨 부인이 별세하였다. 이 무렵 김덕령의 매형 김응회와 내외종간인 송제민은 먼저 국난을 생각하고 개인의 상사(喪事)는 나중이라고 하면서 김덕령에게 거병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덕령은 형의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마는 지금은 모친 상중이니 의병으로 나설 수 없음을 토로한다. 이 때 아우 김덕보가 말하기를 “이같이 임금이 욕을 보고 있을 때에 마땅히 신하가 절개를 지켜야지 어찌 충을 펴는 것을 어렵게 여기십니까? 우리 형제가 마땅히 함께 국난에 나서야 하지만 여막(廬幕)을 지킬 사람이 없으니 형님은 나라 일에 나서고 아우는 여막을 지키겠습니다”하였다. 이에 김덕령은 의병으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10월에는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가 김덕령에게 의병으로 나설 것을 권유하였다. 담양부사 이경린은 김덕령의 제종숙인 김성원, 매형 김응회, 장인 이대록과 친분이 있었고, 장성 현감 이귀는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김덕령과는 동문이었다.
드디어 김덕령은 1593년 윤 11월에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윤 11월4일자 '난중잡록'에는 김덕령의 격문이 실려 있다.
광주 상인(喪人) 김덕령은 도내 각 고을의 여러 군자(君子)에게 공경히 고하나이다. 요사이 보건대, 흉악한 적이 이미 서울에서 나와 영남 변두리에 벌떼처럼 주둔하여 변경의 성보(城堡)에 멧돼지처럼 돌격하여 날로 미친 짓을 방자히 하매, 관군이 패배하고 의병도 또한 움츠러져서 군사를 멈추고 보기만 하고 무찔러 이기려는 뜻이 없으니 위엄을 상실하고 적을 길러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김덕령은 처음부터 소탈한 바탕으로 뜻은 갓끈을 청하는 데 간절하였습니다.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나라에 몸을 던져 감히 조그마한 힘이나마 바칠 생각이었으나, 늙은 모친이 병이 들어 서산에 지는 해와 같았으므로 마지막으로 봉양할 정이 간절하여 차마 뿌리치고 나설 수 없어 두 해를 집에 엎드려 있으면서 칼을 어루만지며 동쪽을 돌아볼 뿐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자식으로서 믿을 데가 없고, 국가에 일이 많으니 신하로서 절개를 다하고자 합니다.
다행히 담양부사 이경린을 만났더니, 그는 종실(宗室)의 후손으로 일찍이 나라 위해 적을 칠 뜻을 품은지라, 나의 헛된 이름을 듣고 전구(戰具)를 준비해 주면서 국난에 임하기를 권하므로 두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침내 애통한 정을 끊어 상복을 벗고 사세에 따라 군중(軍中)으로 나왔나이다. (중략)
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위엄을 기르며 날랜 기운을 쌓아서 범의 굴을 바로 더듬어 백성의 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고 칠묘(七廟 임금의 종묘)의 수치를 씻으려 하오니, 오직 바라건대 먼 데나 가까운 데서 협력하여 위태한 나라를 붙드는 지극한 계책을 함께 마련합시다.
지금 충심(衷心)을 밝혀서 고하오니, 각 읍의 장사 중에 혹시 나를 따를 이가 있을는지요. 아! 2백 년 동안 기르고 가르친 나머지, 분에 겨워 순국(殉國)할 선비가 없을 것인가. 몸을 버려 국난을 구제해야 할 때가 이때입니다. 소매를 떨치고 단(壇)에 오름을 어찌 늦추리오! (중략)
지금 7도가 병화(兵禍)를 입지 않은 데가 없는데 오직 우리 호남만이 도륙을 면하였으니, 회복할 일맥이 여기에 있는데 근래에 물자가 거의 없고 민생이 곤궁하여 병화를 겪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때에 적이 이른다면 누가 다시 막아내리오! (중략)
원하노니, 각 읍의 선비들은 주저하지 말고 분발하는 기운을 배나 더하여 서릿발 같은 창날과 철기(鐵騎)로 우레처럼 굴리고 바람처럼 몰아쳐 간다면 남은 적들이 반드시 흙처럼 무너지고 와해될 것이며, 칼날에 피 묻히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죽기를 기다릴 것이니, 비수(淝水)의 공을 오늘에 세울 수 있고, 전연(澶淵)의 승리를 불시에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거사(擧事)할 것은 아래와 같이 조목을 나열하니, 이 격문이 도착하거든 자세히 생각하여 힘쓸지어다. 또 군사는 정예하기를 힘쓰고 많기를 힘쓰지 않는 것이니, 오중 장사(吳中壯士) 천 여 명을 얻어 함께 가기를 원하나이다.
- 때아닌 가을에 폭염주의보? 역대 가장 더운 9월 중순 무등일보 DB.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9월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11년 만에 가을폭염이 관측됐다.18일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기상청은 지난 16일 광주와 담양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폭염주의보가 나주와 화순까지 확대됐다.폭염주의보 첫날인 16일 광주 낮 최고기온은 31.3도로 평년 기온(26.9도)보다 4.4도 높았다.이튿날인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3.5까지 높아져 평년 기온(27도)과 6.5도 차이가 났다.특히 18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4.5도까지 치솟아 9월 중순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전까지 9월 중순의 최고기온 기록이던 33.7도(1998년 9월 19일·2008년 9월 18일·2008년 9월 19일)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광주지역에서 9월 중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관측 이래 네 번째다.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한가을 폭염'이 나타난 데 이어 2008년과 2011년에도 9월 중순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기상청은 한반도 주위의 고기압에 의해 따뜻한 기류가 유입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아래쪽에는 여름 기단인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우리나라로 불어놓고 있다. 동해상에는 또 다른 고기압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 서쪽 지방에 더운 공기를 유입시킨다.여기에 18일에는 햇살을 막아주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폭염지수를 더욱 높였다.기상청 관계자는 "고기압이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남해상에서 태풍 '난마돌'이 북상하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몰고왔다"며 "태풍이 지난 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본격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폭염주의보는 폭염특보의 한 종류로 이틀 이상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를 웃도는 등 더위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발효된다. 이전까지는 기온을 기준으로 폭염특보를 발령했으나 지난 2020년부터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하는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안혜림기자 wfores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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