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8백명으로 나선 전투 기대 못미치자 실망
전과 없자 이순신 등에 대해 파직 주청 잇따라
79. 거제 장문포 수륙 합동 작전, 실패로 끝나다 - 김덕령 묘소에서
충용장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라 의령에서 차출된 군사 800명을 이끌고 선봉장으로 장문포 전투에 참전하였다. 당시에 김덕령은 각기증을 앓고 있었다. 각기증이란 지대가 낮고 습한 곳에서 찬 기운이 사람에게 올라와 생기는 질환으로, 다리 힘이 약해지고 갑자기 다리를 폈다 굽혔다 하지 못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병이다. 이 병이 심하면 하지 마비, 구토, 보행이상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김덕령이 각기증을 앓고 있었다는 기록은 도원수 권율의 치계와 병조좌랑 김상준의 선조 면담 기록에 나타난다.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 의령의 여러 진영에서 뽑아 온 8백여 명은 김덕령으로 선봉장을 삼고, 곽재우로 도별장을 삼아 전군을 지휘하도록 하여 신칙(申勅)해서 들여보낸 뒤에, 윤두수가 1백 40여명과 이일(李鎰)이 거느린 군사 2백 10여 명은 육전을 지원하도록 장수를 정하여 들여보냈는데, 김덕령이 때마침 각기증을 앓고 있어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모습이 쓰러질 것만 같자, 여러 장수들은 지팡이를 잃은 맹인처럼 모두 겁을 먹은데다가 또 거제의 적병이 산야에 깔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의구심을 가졌습니다.#그림1왼쪽#
장수의 마음이 이미 동요되었으므로 군정(軍情)을 알 만한데 억지로 명령을 내린다면 패할 것이 분명하기에 부득이 곽재우를 수군과 합세하여 기회를 보아 육지에 내려서 곧 바로 격파하도록 지시하였고, 일(李鎰)은 견내량(見乃梁)의 북쪽 해안에 주둔하여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배를 부리는 격군이 고르지 못하다 하여 마음대로 출전 기일을 연기하고 또 바다에 비가 내려 어두워서 나가지 못하고 며칠씩 늦어져 기회를 잡지 못하였고, 저들 적병은 성문을 굳게 닫고 움직이지 않아 조금도 바다로 나올 뜻이 없으므로 접전은 하지도 못하고 군사의 위엄만 손상하였으니 매우 통분합니다.”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또한 병조 좌랑 김상준도 선조에게 김덕령이 선봉을 서야 하는데 병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선조실록 1594년 10월 15일)
각기증에 걸린 김덕령은 9월29일 첫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10월4일의 두 번째 전투에 가까스로 참전한다. 그런데 그는 이 전투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
모든 장수들이 부득이하여 배에 올라 왜영으로 향해 전진하니, 적군은 깃발을 크게 벌려 세우고 성에 올라 대항하였다. 선거이가 김덕령에게, “장군의 용맹을 오늘 보일 만하오” 하였다. 김덕령이 익호기 두 개를 뱃머리에 꽂고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전진하였다. 배가 서로 가까워지자 철환이 비 오듯 쏟아져서 겹쳐서 뚫지 않음이 없게 되자, 김덕령이 어찌할 도리가 없어 배를 끌어 퇴각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김덕령을 따라 모두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 때문에 김덕령은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잃었고 더욱 좌상 윤두수에게 잘못 보이여 마침내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다. (난중잡록 1594년 10월, 연려실 기술)
1594년 9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도 “김덕령은 신용(神勇)이 있으니 싸우지 않으면 몰라도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으로 알았는데, 한 차례 전투에 공이 없자 주변 사람들이 실망하였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영의정 유성룡은 “김덕령이 병이 있다고 하는데, 일이 성공되지 못할 줄 알고 병을 핑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까지 말하고 있다.(선조실록 1594년 10월 14일)
장문포 수륙합동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조정에서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윤두수의 체직을 청한다. 그러나 선조는 이 전투가 자신이 밀지로 내린 전투였음을 감안하여 윤수두를 감싼다.
이런 와중에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11월19일에 보낸 장계가 조정을 발칵 뒤집게 한다. 이 장계에는 전라도 사후선 3척이 실종되고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거의 다 죽은 사실이 적혀 있었다.
“당초 거사할 때 신이 순행 차 진주에 이르러서 전 감사 종사관 최입에게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적간(摘奸)하라고 들여보내고, 신의 군관 강효업·홍윤필 등도 포수를 거느리고 가서 싸움을 도우라고 아울러 들여보냈었습니다. 최입과 강효업 등이 돌아온 뒤에 그쪽 형편을 자세히 물었더니 ‘양굴(兩窟)에 있는 적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아 쌍방이 교전할 때 역력히 셀 수가 있었는데, 다과의 형세로 논한다면 마치 태산이 새알을 누르는 것보다 더하였었다. 외양(外洋)을 배회하고 한랑(閑浪)을 들락날락하며 관망하였는데, 1일 미시에 왜선 3척이 나와 사도(蛇渡)의 병선이 매여 있는 곳을 범하여 배꼬리에 불을 지르고 또 군졸 한 명을 베고 갔으므로 놀라고 통분해 하였다. 그날 저녁에 적선이 어둠을 타고 몰래 나와서 일시에 포를 쏘므로 우리 군사는 매우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전라 주사(全羅舟師)의 사후선(伺侯船) 3척이 실종되어 그 배에 탄 병졸이 거의 다 죽었다. 적이 재차 사도의 선박을 범하여 남김없이 불태웠다. 수직(守直)하던 군졸로 미처 도피하지 못한 자는 모두 피살되었다.
3일에 통제사의 전령에 의하여 군사 1백여 명을 모집해가지고 육지에 내려 군사의 위세를 보였다. 이때 적의 기병과 보병 도합 50여 명이 산을 넘어 돌진해 오므로 아군은 당황하여 급히 후퇴해서 배에 올랐다. 비록 전군이 패하지는 않았으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4년 11월 19일)
이 보고가 알려지자 사헌부는 11월22일에 권율·이순신을 잡아들여 신문하고 윤두수를 파직하라고 주청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번 거제의 싸움에서는 3도의 병력을 다 동원하였으므로 군세(軍勢)가 매우 웅장하였습니다. 양굴(兩窟)의 적도는 수백 명이 못 되었으니, 중과의 형세로 말한다면 마치 태산이 새알을 누르는 격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수륙의 여러 장수들은 한 사람도 죽음을 각오하고 힘껏 싸우지 않고서 혹은 외양에서 배회하기도 하고 혹은 나갔다 물러갔다 하면서 관망하기도 하고, 혹은 안정된 곳에 물러나 있으면서 단지 대장(代將)만을 보내어 결국 군사들이 패하여 위엄을 손상케 하였습니다. 사후선(伺候船) 3척이 실종되고 사도의 병선은 남김없이 소탕되었으며, 그 배에 실린 군졸들은 거의 다 죽었는데도 서로 숨기고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도리어 장황한 말을 늘어놓고 망령되이 공훈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이 조정을 안중에 두지 않고 속이는 일을 자행한 죄가 여간 많지 않으니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을 아울러 나국(拿鞫)하여 율에 의해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체찰사 윤두수도 몸소 대신이 되어 병권을 전담하고서 능히 기회를 보아 책응하지 않고 경솔히 거병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였으며, 또 사실대로 계문하지 않고 방자하게 속이고 숨겼으니, 더욱 무어라고 말할 대상이 안 됩니다. 파직시키소서. (선조실록 1594년 11월 22일)
이에 대하여 선조는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그러자 다시 사간원이 나서서 권율·이순신의 나국과 윤두수의 파직 등을 청하였으나 선조는 거듭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은 이미 군사를 패망시킨 죄를 범했고 또 기망한 죄가 있으니, 왕법(王法)으로 따지면 결코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나국하고 율을 살펴 정죄하게 하소서.
전 체찰사 윤두수는 처치를 잘못하여 국위를 손상시켰고 또 제장들의 허위 보고를 가볍게 믿고 사실대로 계문하지 않았으니, 역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파직시키소서.” (선조실록 1594년 11월 23일)
12월 1일에도 권율 등의 처벌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선조는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장수를 바꾸는 일은 병가(兵家)의 꺼리는 바이니, 체직시킬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사헌부, 사간원등에서 16차례에 걸쳐 탄핵을 당한 윤두수만 체직시키고 이 사건을 마무리 한다.
- 때아닌 가을에 폭염주의보? 역대 가장 더운 9월 중순 무등일보 DB.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9월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11년 만에 가을폭염이 관측됐다.18일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기상청은 지난 16일 광주와 담양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폭염주의보가 나주와 화순까지 확대됐다.폭염주의보 첫날인 16일 광주 낮 최고기온은 31.3도로 평년 기온(26.9도)보다 4.4도 높았다.이튿날인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3.5까지 높아져 평년 기온(27도)과 6.5도 차이가 났다.특히 18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4.5도까지 치솟아 9월 중순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전까지 9월 중순의 최고기온 기록이던 33.7도(1998년 9월 19일·2008년 9월 18일·2008년 9월 19일)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광주지역에서 9월 중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관측 이래 네 번째다.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한가을 폭염'이 나타난 데 이어 2008년과 2011년에도 9월 중순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기상청은 한반도 주위의 고기압에 의해 따뜻한 기류가 유입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아래쪽에는 여름 기단인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우리나라로 불어놓고 있다. 동해상에는 또 다른 고기압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 서쪽 지방에 더운 공기를 유입시킨다.여기에 18일에는 햇살을 막아주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폭염지수를 더욱 높였다.기상청 관계자는 "고기압이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남해상에서 태풍 '난마돌'이 북상하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몰고왔다"며 "태풍이 지난 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본격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폭염주의보는 폭염특보의 한 종류로 이틀 이상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를 웃도는 등 더위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발효된다. 이전까지는 기온을 기준으로 폭염특보를 발령했으나 지난 2020년부터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하는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안혜림기자 wfores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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