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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신 뿌리찾아-82. 김덕령, 이몽학의 난 연루 다시 투옥

입력 2012.07.25. 00:00
왕족 서얼 출신 이몽학 임난 틈타 역모

한현과 홍산에서 승려 앞세워 반란 일으켜

군중심리 자극 위해 김덕령 가담설 퍼트려

1596년 3월초에 의금부에서 풀려난 김덕령은 다시 진주로 돌아온다. 그는 병사들의 사기진작과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기 위하여 힘을 써 보지만, 역부족임을 깨닫고 울분의 세월을 보낸다. 이로부터 4개월이 지난 1596년 7월, 김덕령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되고 만다.

먼저 이몽학의 난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그리고 난중잡록 및 연려실기술 등에 실려 있다.

1596년 7월 초에 이몽학은 충청도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의 난은 조선왕조를 전면 부정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역모였다.

이몽학은 본시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서울에 살았으나,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도 좋지 않아 그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도·전라도를 전전하였다. 그는 충청도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우거하면서 선봉장 한현(韓絢) 등과 친교를 맺었고 그의 부하가 되었다.

한현은 서얼 출신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활동을 하였고 1594년에는 겸사복(兼司僕)으로서 적군이 퇴각한 충청도에 의병들이 갖추어놓았던 군기들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명나라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해 속오법이 시행되자 응모하여 선봉장이 되었고, 같은 서얼출신인 권인룡·김시약 등과 함께 어사 이시발 밑에서 군사조련을 담당하였다.

한현은 충정도 전역을 돌아다녀 민정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전란과 흉년 그리고 과중한 부역으로 민심은 탄식과 원망으로 차 있었고, 크고 작은 고을에 모두 방비가 없음을 보고 그는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림1왼쪽#

이몽학과 한현 등은 김경창·이구·장후재, 사노(私奴) 팽종, 도천사(道泉寺) 승려 능운 등과 함께 승속군(僧俗軍) 600∼700명을 거느리고 홍산 쌍방축(雙防築)에 모여 거사를 꾀하였다.

이 때 한현이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에 있었는데, 우선에 이몽학이 먼저 거사하기로 하고 한현은 내포(內浦)에서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을 정하였다.

이몽학은 무량사의 굴속으로 잠입하여 승려들과 더불어 기치(旗幟)와 기장(器杖)을 만들었다. 충청도의 풍속에 흔히들 동갑회(同甲會)를 만들었는데, 이에 그 패거리를 시켜 계(契)를 만든다고 선전하고 동네 어귀 들판으로 모이게 했다.

이몽학은 절에서 출병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깃발을 세우고 걸상에 앉아 각(角)을 불고 북을 치면서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갑 모임 중에서 공모한 장정이 먼저 나와 칼을 뽑아 들고 무리를 데리고 달려 나갔다. 이몽학은 그들에게 속임수로 꾀기를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고 하니 모두들 좋다고 떠들면서 그를 따랐으며,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聖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와 속인을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으로 가칭하니 사족 자제와 무뢰배들이 많이 그들에게 붙었다.

7월6일 밤에 이몽학은 홍산현(鴻山縣)을 습격하여 현감 윤영현과 임천군수 박진국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모두 항복하여 이몽학에게 붙으니 이몽학은 그들을 상빈(上賓)으로 대우했다.

잇따라 이몽학은 정산, 청양, 대흥, 부여 등 6개 고을을 함락시켰다. 7월 7일에는 정산현(定山縣)을, 8일에는 청양현(靑陽縣)을 함락시키니 정산현감 정대경과 청양현감 윤승서는 도망하였다.

9일에는 대흥군(大興郡)을 함락시키니 군수 이질수는 산중으로 숨었다. 또한, 부여현감 허수겸은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겁을 먹어 수하 부하들이 무기를 적진으로 운반하는 것을 보고도 감히 처단하지 못하고,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자 문서를 반란군에 전해주었다. 서산군수 이충길은 아우 3명을 반란군에게 몰래 보내어 내통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고을 수령들은 도주하거나 항복하고 혹은 반란군을 도와주었고, 아전과 백성들도 모두 반란군에게 가세하였다.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이어 군사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이몽학은 소문을 퍼뜨리기를 ‘충용장 김덕령과 의병장 곽재우·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이 내응한다’하여 기세를 올렸다.

마침내 이몽학은 7월10일에 충청도의 요충지인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은 관속(官屬) 이희·신수를 반란군 진영에 보내어 거짓 투항하게 하여 방어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한편, 민병(民兵)을 모았다.

고을에 사는 무장 임득의·박명현과 순찰사 이정암의 종사관 신경행 등을 불러서 성을 지킬 계책을 논의하고는 성 밖에 연이어 있는 민간 초가집들을 그대로 놓아두면 적들이 비를 피하고 밥을 해먹기에 편리하다고 하여 밤에 불화살을 쏘아 모두 태워버렸다.

이윽고 남포현감 박동선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충청수사 최호에게 급히 알리고 군병을 동원하여 홍주를 구원하자고 하니, 충청수사는 남포현감에게 자기에게 와서 상의하라고 했다.

현감 박동선은 즉시 달려가서 홍주로 곧장 진군하자고 말하자, 수사 최호는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다’ 하면서 난색을 표했다. 박동선은 큰소리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이야기하는가’ 하였다. 드디어 수사는 수군을 동원하였고 보령 현감 황응성도 홍주성에 함께 들어갔다.

홍주성은 원병을 얻어 크게 기뻐하여 성 머리로 나와 서고, 밤이 되자 성가퀴에 횃불을 벌려 세우자 성 안팎이 환히 밝아졌다.

이몽학은 홍주성을 포위하였으나 목사 홍가신이 굳게 지켜 막아 싸우니,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11일 새벽에 이몽학은 군대를 이끌고 덕산(德山)으로 향하였는데,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몽학은 다시 거짓말로 꾀기를, “읍내나 촌에 사는 백성들은 편안히 있고 동하지 말라. 이번 거사는 남아 있는 백성을 수화(水火) 가운데서 구제하려는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장군 김덕령과 영천 군수 홍계남 등은 다 우리와 공모되었으니,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서울로 향하리라”하였다.

관군은 이 때를 이용해 반란군 진영에 무사를 보내어 혼란시키면서,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회유하였다.

한편 7월 12일에 도원수 권율은 충청병사 이시언의 요청의 의하여 전라감사 박홍로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을 거쳐 이산(尼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권율은 반란군의 세력이 매우 많음을 알고 충용장 김덕령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호남 군사가 부여군 석성(石城)에 이르렀을 때 전주 판관이 척후장(斥候將)으로서 먼저 들어가 적을 정탐하였다. 판관의 아장 윤계(尹誡)가 장사 10여 명을 모집하여 밤에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총통을 연달아 쏘며 큰소리로 외치니, 반란군들이 크게 놀라 떠들었다.

윤계가 외치기를, “도원수와 전라 감사와 충용장 김덕령이 각기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이미 이 땅에 도착하였으니 내일은 마땅히 소굴을 무찔러 죽여 남김이 없게 할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는 아마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따른 자가 많을 것이니, 만약 적장을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면 죽음은 면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이 무렵 반란군의 막하였던 김경창·임억명·태근 세 사람이 장막에 들어가 이몽학을 누운 자리에서 베어 죽이니 반란군들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이 때 한현은 반란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홍주 땅에 주둔하였는데, 충청병사 이시언이 홍주 목사 홍가신과 함께 진군하여 치니 반란군이 패하여 달아났다. 한현은 면천으로 도망하였으나 면천군수 이원에게 잡혀 홍주옥에 갇혔다. 그는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선조임금의 친국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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