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시골집 이야기

@허탁 전남대 의과대학 교수 입력 2019.11.17. 13:24

허탁 전남대 의과대학 교수

올해 4월말 돌아가신 아버님을 고향 앞산에 모셨다. 산을 내려오며 보는 시골집은 10년간 버려져서 무성한 잡초와 잡목으로 건물의 모습을 가렸다. 주위에서 버린 쓰레기 사이로 지붕까지 자란 영산홍이 곱게 꽃을 홀로 붉게 피웠다. 옆에서 걷던 당숙께서 “탁아 이렇게 버려 둘거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시골집 사랑은 특별했다. 공무원에서 정년하시고 10년 전 뇌출혈로 수술을 받기 전까지 아버님은 시골집에 머무르시며 은행나무를 키우셨다. 귀여운 앵두나무도 심으시고 틈틈이 가옥을 수리하셨다. 뇌수술 이후 거동이 불편하심에도 늘 시골집 걱정을 하셨고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모갈집의 사랑채 지붕을 고쳐야 하는데…” 하시며 염려하셨다.

시골집을 고치기로 마음먹고 한옥복원가에게 일을 맡겼다. 처음으로 상량을 주의 깊게 보니 ‘一八八一’이라는 한자가 있어 1881년에 집을 지었다고 여겼다. 집주위에 있는 쓰레기를 버리고 잡목과 잡초를 걷어 내니 제법 기품 있는 한옥의 자태가 드러났다. 약 140년 된 한옥이 아름답고 증조부의 이야기를 담으면 혹시 문화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임실군청에 문의했다.

전화를 받은 문화재 담당 직원은 “예! 허주어른의 생가라고요?”라고 놀라며 즉시 시골집으로 달려 왔다. 제일 먼저 상량에 쓰인 ‘金官一八八一壬戌’을 보고 ‘一八八一’은 서기 1881년이 아니고 ‘금관 1881년 임술년’으로 보는 게 타당하며 5·16 군사정변 이전에는 서기를 쓰지 않았다고 부연 설명했다. ‘金官’은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로 여겨지며 대략 서기 41년에 개국했다면 1881년이 된 임술년, 서기 1922년에 집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어서 증조부 허주어른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성균관 박사를 하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셨다. 노양학규를 지어 후진 교육에 전력하면서 윤리도덕을 근본으로 동서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기미년 오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식율사(殖栗社, 사성계)를 조직하여 산이 많고 들이 적은 지역특성을 고려하여 밤나무 단지를 조성해 주민의 소득증대에 이바지했다.

임실군청 직원의 결론은 가택이 약 100년에 불과하고 아름답기는 하나 특별하지 않다. 허주어른은 임실군의 큰 인물이나 전국적인 위인은 아니다. 임실군에서 집 앞에 푯말은 세우겠으나 문화재로 인정받기는 어렵겠다.

아쉬워하는 필자에게 시골집 뒤로 들을 건너 우뚝 멈춰 선 ‘노산(蘆山)’ 이야기를 꺼냈다. 과거 근방에 살던 선비들의 지리적 중심이 ‘노산’이었다. 어떤 곳의 지리를 말하면서 ‘노산에서 서쪽으로 몇 리에 있다’ 뭐 이런 식이다. 처음 노산 아래 자리를 잡은 집안의 제각 기문에는 “노산(魯山·단종)이 왕위를 빼앗기는 날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노산 아래 내려가서 노재를 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고 적혀있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다른 이름인 ‘노산군’의 노산과 같은 지명이라는 이유만으로 여기 노산 아래로 내려와 기거했다. 참으로 선명한 선비의 단심이다. 그 뒤로 15개 가문이 낙향하여 노산아래 뿌리를 내렸다. 이 동네 허가 집안도 그중 하나였다.

어릴 적 아버님은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증조부는 마을에서 오리쯤 올라 간 산기슭의 재실에서 기거하시며 늘 글을 읽으셨다. 이른 아침이면 마을로 내려 오셔서 동네 친지와 인사하시고 식사를 마치시면 다시 재실로 올라 가셨다. 일제강점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가 노송 새로 솔바람만 늘 여울지며 인가도 없는 노산의 산기슭에 머무르셨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필자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중국과 서양 역사를 제법 알고 있다. 이번 시골집을 고치면서 증조부와 노산에 얽힌 이야기를 새로 알았다. 그 동안 화려한 유적과 이야기에 현혹돼서 나와 주위의 역사를 소홀히 했다. 점점 가족이 분화하고 아파트에 살면서 우리의 역사가 잊혀진다. 자존감과 주체성을 갖고 한 개인으로 지금을 살아가려면 ‘나’를 중심으로 주변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

시골집을 고치며 알게 된 ‘금관가야’, ‘노양학규’, ‘오수 독립만세운동’, ‘식율사’, ’노산‘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재밌고 유익했다. 시골집 공사의 끝으로 가는 지금이라도 이 모든 이야기를 상징으로 돌과 나무 그리고 건물에 담아야겠다. 시골집과 증조부, 노산에 얽힌 이야기를 알려준 임실군청의 문화재 담당 직원이 건넨 명함의 뒷면에 이런 글이 있었다. ‘노산(蘆山)에 살어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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