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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종 박사의 고고학 산책

조현종 박사의 고고학 산책<9> 누산따라 컬렉션

입력 2019.12.08. 17:19 수정 2020.04.02. 16:58 @조덕진 moleung@gmail.com
진정한 아시아문화연구의 첫걸음 내딛다
1584년 윌리엄 공을 저격한 총탄 흔적(2017년)

2017년 2월 나는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델프트를 방문하였다. 델프트는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5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로테르담과 덴하그(헤이그)사이에 위치한다. 도시의 중심에는 광장이 있고 그 주변에 배치된 1600년경의 시청사와 첨탑이 가미된 교회건축물이 델프트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이 도시의 인상은 운하가 주는 경관, 즉, 정갈함과 여유로움이다.

광장과 연결되는 역사지구에는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특이한 점은 이곳에서 파는 도자기가 온통 파란색이라는 것이다. 델프트가 17세기에 중국에서 수입한 청화백자를 모방하여 만든 유럽산 청화백자의 발상지인 까닭이다. 백자의 도토가 없던 유럽에서 그들은 바탕에 흰색을 칠한 뒤, 그 위에 청색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넣고 구워 이른바 델프트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중국의 청화백자와는 겉만 같았지만, 유럽왕실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델프트는 크게 번성하였다.

도자기 말고도 델프트는 세계적인 걸작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고향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황금기를 구가한 렘브란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는 델프트 도자기에서 영감을 얻어 파란색을 즐겨 사용하였다. 나는 헤이그의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에 전시된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서있었던 기억이 있다. 2003년, 그림의 스토리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지만, 대학원 강의 시절에 본 도판이 전부이던 내게 단순한 구성과 선명한 색채, 그리고 생동하는 빛으로 대비되는 이 그림이 왜 바로크의 정점에 있는가를 새삼 느끼게 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이 도시에서 놀란 것은 2발의 총탄자국이다.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상징인 오렌지공 윌리엄이 1584년 스페인 자객의 총탄을 맞고 죽어간 그 야만의 흔적! 1911년 이 건물은 델프트시립 프린센호프 박물관이 되었는데, 박물관은 벽면에 움푹 패인 2개의 총탄자국에 띠를 두르고 그 날의 흔적에 대한 설명을 붙여 놓았다. 실로 오래된 이 총탄의 흔적은 우리역사에선 조선시대 선조 17년, 임진왜란 발발 8년 전의 일인데, 지금 우리에겐 당시 왜인들의 잔혹함을 설명할 흔적은 어디에도 없질 않나? 그렇다고 40년 전 광주의 총탄자국들은 잘 남아 있는가?

내가 델프트를 방문한 목적은 이곳에 있는 누산따라(nusantara; 많은 섬들의 나라란 뜻으로 인도네시아를 말함)박물관이 소장한 컬렉션을 기증받기 위함이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부터 동양으로 진출하였으며 17세기 초에는 인도네시아의 무역을 독점하더니 이내 식민지로 만들었다. 누산따라 박물관은 네덜란드가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수집한 민족지 및 민속자료를 소장한 곳으로, 1911년 개관하여 2013년 경영악화로 문을 닫게 되었다. 폐관 이후, 컬렉션은 델프트 헤리티지가 관리하였는데, 상업적인 매매를 금지하는 국제박물관협의회 규정에 따라 자격을 갖춘 등록박물관을 기증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아시아문화원과 연결되었다.

누산따라 컬렉션은 네덜란드의 여러 박물관 및 오스트리아 세계박물관, 스웨덴 국립세계문화박물관등 유럽과,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 싱가포르 아시아 문명박물관 등 아시아지역에 분산 기증되었다. 그중 7천700점에 달하는 최대의 컬렉션이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 자리 잡았다. ACC가 누산따라 컬렉션을 소장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험난하였지만, 결국 유례 없이 엄청난 자료를 소장하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ACC가 진정으로 아시아문화의 전당이 되려면 아시아지역의 아카이브구축과 연구 인력의 확보에 인색해선 안 된다. 연구역량이 결여된 성과나 텍스트가 없는 콘텐츠는 또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델프트시를 방문하는 동안 나와 동료들은 컬렉션에 대한 현지실사와 헤리티지재단과의 협의를 통해 기증될 컬렉션의 종류와 수량을 결정하였으며, 포장과 운송에 관한 절차와 역할도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2018년 7천715건의 누산따라 컬렉션은 2차에 걸쳐 선박편으로 부산항에 도착하였으며 광주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 ACC에 소장되었다. 소장된 컬렉션은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350여년의 식민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수집된 예술품과 의례도구, 칼과 창 등의 무기, 바틱을 비롯한 다양한 직물 및 용기와 같은 생활용품들로 인류학 또는 민족지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로써 아시아의 민족지연구를 목적으로 1977년 문을 연 오사카의 민족학박물관도 1949년 개설된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롬비아대학의 인류학박물관도 아닌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인도네시아 컬렉션을 갖게 된 것이다. 누산따라 컬렉션의 소장은 곧 아시아문화연구의 진정한 시작의 발걸음인 셈이며, 점차 정리와 보존, 연구 작업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마침 아시아문화연구소는 그동안 정리된 컬렉션의 일부를 근사한 도록과 함께 특별전(11,22~06.21/2020)으로 기획하여 공개하고 있다.

아시아문화전당에 가면 카피한 복사물과 빛바랜 종이들이 아닌 아시아인들의 역사와 손때가 묻은 진품들의 아시아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현종은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국립광주박물관장을 역임하고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했다. 1992년부터 2016년까지 광주신창동유적의 조사와 연구를 수행했고, 현재는 국제저습지학회 편집위원, 광주고고문물연구소 이사장으로 동아시아 문물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 초기도작문화연구’ ‘저습지고고학’ ‘2,000년전의 타임캡슐’ ‘탐매’ ‘풍죽’ 등 연구와 저작, 전시기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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