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치숙은 자체 제작한 독립 선언서를
고흥군수, 순천 법원·지청, 순천헌병대
보조원에게 보냈다. 그가 보낸 선언서는
“일본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고 합병을
선언하였는데, 그 당시 주권자인 조선 신민으로
그것을 희망하는 자, 매국노 몇 사람을
제외하고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 민족은
독립만이 살길이요, 합병은 죽음일 따름이니
독립을 널리 선포하노라”는 내용이었다
이 선언문을 일본의 모든 공공기관에 보내어
우리의 독립 의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강한 항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최근 항일 운동 유적지를 살피기 위해 영광, 함평, 장흥 지역을 찾았다. 영광읍 우산 근린공원에는 우리에게 낯선 애국지사 추모비가 있다. 이화삼 의병장과 황덕환 애국지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화삼은 영광, 장성 등지에서 빛나는 의병 전쟁을 벌이다 전사한 영광 출신 이대극 의병장을 대신하여 부대를 지휘하다 순국하였다. 장성 출신임에도 영광의 한복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원에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출신지를 초월하여 그 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을 기리고자 한 영광 주민들의 숭고한 뜻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황덕환 애국지사는 일본 유학 중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군자금 모집을 하다 투옥되었다. 출옥 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신민부에서 별동대장을 하며 친일파를 척살하였는데, 이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 중 조선인을 경멸하는 일본인을 죽여 사형을 당하였다. 함경남도 원산으로 되어 있는 본적 때문에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함경도 출신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주소가 영광 양덕리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광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영광에서 그의 추모비를 세워 기념하는 일은 당연하다. 다만 추모비 안내판에 유명한 ‘신민부’에서 활동을 ‘신민주’로 오기한 부분이 두 군데나 발견되었다. 玉의 티가 아닐 수 없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물론, 안내판, 설명글 등에 잘못된 설명이 의외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전수조사의 필요성이 느껴진다.
한편 고흥 도화에도 을사오적의 한사람인 이근택에게 중상을 입힌 장성출신 기산도 의병장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의 악랄한 고문을 이기기 위해 혀를 깨물어 말도 하지 못하고 걸음도 걷지 못하였다. 스스로 ‘유리개걸지사’를 자처하며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흥에서 말년을 보냈다. 자기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의 추모비를 세워준 고흥 주민들의 높은 정신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광주·전남 지역민들의 높은 민족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1월 3일은 나주에서 시작되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적으로 확대된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인 11·3 학생운동이 일어난 지 9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한 행사들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그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광주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져 있다가 친일 행위 때문에 철거된 前 전남교육감 안용백의 흉상이 향리인 보성의 국도변에 옮겨져 있는 사실을 본보가 보도하여 철거가 결정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친일 행적을 보인 인물도 적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11월 17일은 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별도로 지정된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날 정부에서는 그동안 뚜렷한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한 애국 지사에게 유공자 서훈을 하였다. 고흥 포두 출신 신균우 선생이 이날 서훈의 주인공이다. 그는 1943년 일어난 제2차 광주 학생 독립운동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징역 4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해방을 맞은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오다 실종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유공자 선정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뜻깊은 11·3학생 운동 90주년을 맞아 선생의 공적이 인정되어 무척 다행으로 여긴다. 광주 3·1운동 주역 김범수 선생, 11·3학생 운동의 주역 이기홍 선생 등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빛나는 항일 운동을 하였지만, 확실하지 않은 의문으로 유공자 선정이 미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제는 정부에서도 이들의 업적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몸을 조국 독립에 바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 생각한다.
전남의 제일 남단 반도에 자리 잡은 고흥지역에서도 1919년 3·1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고흥은 반도의 특수성답게 외부와 소통이 활발한 편이다.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 소식이 어느 지역보다 빨리 전해졌다. 천도교도인 송연섭을 통해 독립 선언서가 일찍 전해졌던 고흥지역에는 서울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도인 오석주가 귀향하였고,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상경하던 목치숙 역시 서울 시위에 참여하고 신학교 입학을 단념하고 독립선언서 1부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게다가 3월 10일 광주 시위를 적극적으로 준비한 광주 숭일학교 교사 신의구, 광주 시위에 앞장선 수피아 여학교 여학생 박성순, 숭일학교 박오기 등도 고흥 출신이었다. 이들을 통해 3·1운동의 열기가 고흥지역에 전달되고 있었다. 고흥의 3·1운동은 이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 목치숙과 오석주가 있었다.
서울에서 돌아온 목치숙은 고흥 남양 신흥리에 사는 기독교인 이형숙, 손재곤, 최세진, 조병호, 이석완 등에게 파리 강화회의 결과를 소개하며 독립 만세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고흥 장날인 4월 14일 만세 시위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는 4월 7일 오석주에게 태극기 80여 매와 독립 선언서 100여 개를 제작하게 하는 한편 고흥지역 기독교인들에게도 연락하여 지지자를 규합할 것을 부탁하였다. 친구 한익수에게 ‘조선독립고흥단’ 이름으로 자체 선언서 10여 매를 작성하도록 하여 4월 14일 고흥 장터에 사람들이 모이게 하였다.
이에 따라 남양면의 이석완, 금산면의 오석주 등은 그 전날 고흥읍에서 유숙하였고,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거사일인 4월 14일 엄청난 폭우로 인하여 시위를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목치숙은 자체 제작한 독립 선언서를 고흥군수, 순천 법원·지청, 순천헌병대 보조원에게 보냈다. 각 관청에 근무하는 조선인들에게도 선언서를 보냈다. 선언서와 함께 조선 혈족들이 모두 동맹 파업할 것을 담은 편지까지 함께 동봉하였다. 그가 보낸 선언서는 “일본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고 합병을 선언하였는데, 그 당시 주권자인 조선 신민으로 그것을 희망하는 자, 매국노 몇 사람을 제외하고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 민족은 독립만이 살길이요, 합병은 죽음일 따름이니 독립을 널리 선포하노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작성한 선언문은 당시 동양평화론을 내세우다 우리를 강제 병합한 일본의 태도를 정확히 지적하며 우리 국민 대부분이 일제의 병합을 반대하고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선언문을 일본의 모든 공공기관에 보내어 우리의 독립 의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강한 항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시위를 계획한 목치숙과 오석주는 각각 징역 6월, 한익수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았다.
목치숙은 출옥 후에도 고흥 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 고문의 휴유증으로 1928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오석주는 1938년 고흥 금산의 금천교회와 도양의 중앙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하다 불경죄로 징역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도양, 금산, 봉래,점암, 포두, 도화, 남양, 동강 등 고흥 전 지역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도화, 포두, 남양, 동강 등의 시위에는 기독교와 천도교의 참여가 많았다. 금산에서는 어선에서 태극기를 올리고 만세 시위를 하였다.
한편 1896년 1월 김복한이 주도한 충청도 홍주 의병에서 활약한 고흥 유생 송주헌은 1919년 3·1운동 직후 파리강화회의에 유생 137명이 연명으로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보낸 이른바 ‘파리 장서 사건’ 때 서명하여 이 지역 유생의 항일 의식을 대변하였다. 그는 이어 홍주 의병 때 참여한 유생들과 함께 융희황제를 복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선고받았으나 방면되었다. 송주헌의 항일 운동은 3·1운동 당시 참여가 두드러지지 않아 한계로 지적된 유생들의 구체적인 항일 운동의 본보기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고흥지역에서의 만세 운동은 일본 당국에 공개적으로 독립 의지를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지만, 천도교, 유교 등 다른 종교계도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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