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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항쟁이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토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부심”

입력 2018.05.28. 17:53
정현애 회장

“5월 항쟁이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토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부심”

정현애 오월어머니집 이사장

오월 어머니집은

1980년 전후 여성들의 고난,

고난을 극복해온 과정을

시민과 광주를 찾는 분들과

공유하는 공적 공간

안정화, 영속화 중요

정현애 오월어머니집 이사장. 1980년 5월 민중항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 복판을 시민들과 함께하고 구속과 석방, 민주인사 구속자 석방운동, 송백회, 오월어머니회에 이르기까지 정 이사장의 삶의 여정은 광주현대사의 산 역사에 다름 아니다. 평범한 교사 민주인사 구속자지원, 광주시의회 부의장이라는 정치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정 이사장의 삶과 오월 어머니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 주>

정현애 오월어머니집 이사장(66)의 삶은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 사회운동사에 중요 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대중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건 정치인 정현애 일 것이다.

지난 2004년 야당이 고 노무현대통령 탄핵발의에 나서자 당시 광주시의회 부의장이었던 정현애 이사장은 탄핵발의 부당성에 대한 항의로 현직 정치인 중 유일하게 의원직을 내던졌다. 그 수많은 남성 정치인들이 시류를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는 시절 그녀는 과감히 자신의 기득권을 내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제스처나 선전용 문구가 아닌 과감한 실행, 정 이사장의 삶의 궤적을 좆아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5월정신 헌법 수록 기대 커

“기대가 큽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께서 기념사에서 ‘진정한 민주 공화국의 기본정신이 될 수 있도록 5월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민족이 원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토대가 될 수 있겠다는 자부심이 들었어요”

38주년 5월 민주화운동을 맞는 정현애 이사장의 소회다.

“그때는 ‘빨갱이’로 몰린다는 공포가 너무 컸어요”

1980년 19일 간의 항쟁이 전개되는 동안 윤상원 열사를 비롯한 항쟁지도부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광주 운동권을 빨갱이로 몰아 눈앞에 벌어지는 끔찍한 살상의 모든 책임을 피해자들에게 뒤집어씌울 것이라는 공포. 너무나 현실적이고 숨이 막히게 몰아치는 공포였다. 자칫 잘못하면, 한 발만 잘못 내딛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었다.

흩어져서는 안됐다. ‘합법적인 힘을 발휘하고 질서의식이나 높은 도덕의식만이 우리를 지킬 수 있다’는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했다.

정 이사장은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도덕적 인간의 성장이라는 것을, 그 힘을 광주시민에게 보고 느꼈다”며 “시민들을 보고 지금 여기서 실패하더라도 다음 역사가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직접 몸으로 실천하고 죽음으로까지 해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5월 항쟁의 한 복판에서

“어쩌면 5월이 제게는 운명인지도 모르겠어요“

함평군 월야면 4남1녀의 차녀로 어렵사리 대학공부를 마치고 동생들을 보살펴야했던 영민한 소녀 정현애가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적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학교부지를 제공할 정도로 일대 지주였다. 허나 철저한 장자상속 풍토에 둘째 아들네인 그녀 집안은 생계를 걱정할 정도였다. 영민한 정현애를 아깝게 여긴 초등교장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우여곡절 끝에 광주로 진학했다. 동생들을 건사해야한다는 책임감, ‘여자’를 가르친다는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 근방의 유일한 여대생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한다는게 뭘까. 가족을 위한다는건 뭘까.’ 자신과 사회문제에 눈이 틔인 사춘기 소녀의 작은 고민이었다.

교사생활 중 이화여대 학생운동으로 피신 다니던 친구 정선자씨를 만나며 세상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학습이 본격화됐다. 녹두서점에서의 공부는 그녀의 평생의 동지이자 남편인 김상윤(사)윤상원열사기념사업회이사장과 인연이자 광주 한복판으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김 이사장은 당시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민주인사들과 모임을 갖고 젊은 학생들과 사회문제를 공부하며 민청학련사건으로 공안의 감시를 받던 시절이었다. 윤상원열사도 김 이사장과 학습 하던 후배다. 전남대 정외과를 나와 주택은행에 입사했으나 과감히 직장을 때려치우고 광주로 내려와 야학운동을 하다 80년 한복판으로 걸어들어갔다. 가난한 집안의 3남4녀의 장남이었던 윤상원의 귀향은 적잖은 부담이었다. 녹두서점을 장동으로 옮기며 윤상원열사가 운영토록해 생계와 야학운동의 터전이 되도록 했다.

녹두서점의 안주인

녹두서점은 당시 학생과 민주인사들의 거점이었다. 녹두서점 안주인 정 이사장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수배중인 학생이나 민주인사들에게 도망자금을 제공하는 일들을 도맡았다. 교사월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찌어찌 연명해가며 교사 신용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버텨나가는 일상이었다.

5월16일 광주 횃불행진 이후 서울지역 학생들이 모두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5월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예비검속이 시작되자 박관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은 겨우 피신을 시켰지만 김상윤은 중무장한 군인들에게 구속됐다. 민주인사 부인들과 소식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녹두서점으로 몰려들었다.

18일 이후 학살이 극에 달했다. 6.25 전쟁시절 인공 때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윤상원 열사와 함께 상황일지를 만들며 상황실 역할을 했다. 정 이사장은 “학살이 너무 잔학해지면서 시민들이 잦아들줄 알았다. ‘학생들을 죽일수 없다’며 시민들이 나오는 걸 보고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모든 연락이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상황이 급박해지니 노출된 서점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21일 집단발포 이후 도청인근인 녹두서점이 위험해서 피신을 하다 나주에서 올라오는 무기를 실은 트럭을 만났다.

순간 머리가 하애졌다. 남편의 안위도 걱정이 되고 계속 피난을 가야할 건지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순간, 이정도 되면 모든 혁명이 그랬듯 시민이 희생당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피난길을 계속할 수 없었다.

“ 시민이 무장을 하면 비극으로 끝나지 않은 사건이 없다. 프랑스 혁명도 그랬고, 저러다 시민들 모두 죽겠다”

발길을 돌렸다.

목숨건 석방운동

항쟁 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영창은 남성들이 갇혀있어 여성들은 낮에는 영창 운동구장에 버려졌다 밤이 되면 사무실로 가두는 날들이 반복됐다. 수감할 곳이 없으니 505 보안대로 장소가 옮겨졌다.

가족을 모두 잡아들일 수 없었는지 김상윤 이사장은 잡아들이고 정 이사장은 석방됐다.

항쟁 이듬해인 1981년 3월31일 5.18 관련자들에 대해 대법원이 사형판결을 내렸다. 그동안 벌인 숱한 석방운동이 무위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지역 여성들과 서울 명동성당으로 올라가 3박4일 단식농성을 하며 김수환 추기경에게 대통령에게 사면을 부탁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당시 광주대교구장이던 윤공희 대주교가 전두환을 만났으나 소득이 없었다. ‘이렇게 해야 사람 못살리니 내려가라’는 답을 돌아왔다.

광주로 내려가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다.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알수 없는 시절이었다. 추기경 방은 치외법권지역이라는 사실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김 추기경을 따라 무조건 방으로 들어섰다. 추기경 방을 ‘무단 점거’한 다음날인 81년 4월3일 무기형 감형 소식이 전해졌다.

울 수도 없었고 울지도 못한다

80년 당시 그 참혹한 현장을 접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수가 없었다. 그 끔찍함에 우는 것조차 호사스럽게 느껴져서다. 우는 것은 이분들을 기억하는 방식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감정을 억누르며 절규하는 시민들을 보며 ‘ 저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흘리면 안된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후유증은 오롯이 감내해야 했다. 익숙해질 수 없는 슬픔과 분노 공포가 항상 침잠해있다. 5월을 담은 영화나 소설 연극 등 그 어떠한 작품도 보지 못하는 이유다. 지금껏 공식행사가 아니면 5월 관련 작품을 보지 못했다. 내면에 도사린 감정의 선들이 건드려지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다.

5월 어머니집 안정적 운영 과제

“1980년을 전후해 자식이나 남편을 잃거나 구속된 가족의 생사를 찾아 헤맸던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야하는데 고민이 많습니다”

최근 오월어머니집 이사장을 맡은 정현애 이사장은 오월 어머니집의 안정적 운영과 활성화 고민을 털어놨다.

피해 당사자인 오월어머니들의 회비와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근근이 운영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집을 찾는 대내외의 소님들을 접대하고 수용하기에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정 이사장은 “오월 어머니집은 80년에 가족을 잃거나 피해를 입은 어머니들의 단순한 의지처가 아니라 1980년을 전후한 광주여성들의 고난과 고난을 극복해온 과정을 시민과 광주를 찾는 분들과 공유하는 공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장기적으로 5월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와 뜻을 모아 만들어 나가야한다”고 강조한다.

글=조덕진기자 사진=오세옥기자

정현애

제6대 광주광역시의회 교육위원회 위원

제6대 광주광역시의회 전반기 부의장

제6대 광주광역시의회 의원

제4대 광주광역시의회 전반기 부의장

제4대 광주광역시의회 의원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고문

오월여성제 추진위원장

교육시설재난공제회 상임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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