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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광주 역사산책 30. 서창 (西倉)
입력시간 : 2014. 02.20. 00:00


서창교와 서창마을- 광주 광산구 송정에서 서창으로 건너는 서창교와 서창동네, 광주고을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고을백성들에게 거둬들인 세곡을 모아두었다가 영산포조창·법성창으로 보내졌다.오세옥기자
고을백성들에게 거둬들인 세곡 모아

영산포조창·법성창으로 보냈던 창고

세곡선들이 정박했던 서창은

강 건너 송정으로 건너다니던

나루터로 쓰였고 세곡 거둬들일땐

광주 읍내쪽 사람들 세곡 싣고와

북새통 이뤄 임시장 서기도 해서

나루 극락진, 나루터 주막 극락원

장이름을 극락장이라 부르기도

조선시대 광주고을에서 서쪽을 상징하는 땅이름은 서창뿐이었다. 당시 고을 관아는 아시아문화전당이 건설되고 있는 광산동에 있었고 북쪽 30리인 천곡(泉谷·지금의 월계동)에 동창(東倉)이 있었으며 서창동에 서창(西倉)이 있었다. 이 두 창고는 고을백성들에게서 거둬들인 세곡을 모아두었다가 1월부터 4월 사이에 영산포조창이나 법성창으로 보냈던 광주고을 창고를 말한다. 동창과 서창은 다같이 영산강변에 있어서 배로 국가창고로 옮기도록 둔 것으로 서창은 서창동 산4번지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이곳 일대를 ‘창등’이라고 하는데 50여년전까지도 이 강변에는 배를 매두던 계선주돌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 있던 농선비(農船碑)는 1974년 서창지서곁으로 옮겨놓았다. 세곡선들이 정박했던 서창은 강 건너 송정으로 건너다니던 나루터로 쓰였고 세곡을 거둬들일때면 광주 읍내쪽 사람들이 세곡을 싣고와 북새통을 이뤄 임시장이 서기도 해서 이곳 나루를 극락진, 나루터 주막을 극락원, 장이름을 극락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물론 이곳은 조선시대 고을 세곡창이나 나루로 이용하기전에도 나루터로 이용했던지 고려시대에는 벽진(碧津)이라 불렀고 당시 행정구역의 일종인 부곡(部曲)이었으며 김씨들이 살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1914년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될때 이곳 일대는 서창이란 창고이름을 따서 서창면(西倉面)이라 했으나 본디 서창은 구한말 방하동면에 속하던 창촌리이다.

1759년의 영조때 만든 '여지도서'라는 책을 보면 방하동면의 호수는 272호로 인구는 1,092명이었다. 이곳에는 창촌, 사동, 이문, 발산, 신용, 두태촌, 가음내, 신촌등 동네가 있었고 식민통치전인 1909년에는 중촌, 송정, 대촌, 마현, 원촌, 난산, 봉확, 내동, 구기, 학동 등 동네가 생겨 357호 2,005명으로 늘어났다. 이무렵 이곳 창촌에도 두름박거리주막이 있었고 나루건너 송정리에는 배나들이 주막이 있었다. 이 방하동면에 서창북부에 있던 선도면(船道面) 동하, 세동, 방하동면 창촌이 합해져 세하리가 되고 마산, 월산과 당부면에 속했던 벽진리가 합해져 벽진리가 되었다. 선도면 개산, 동산, 회산, 화계, 당부면 운리가 합해져 매월리가 되고 당부면 신기, 북촌, 마륵리가 합해져 마륵리가 되었다. 당부면 심곡, 만호, 금부, 망월을 합해 금부의 금자와 망호의 호자를 떼어내 금호리라 하고 당부면 풍암, 운리, 선도면 화개를 합해 풍암리라 했다. 창촌의 남쪽 건너 방하동면 대촌, 구기, 송정과 동각면 복호, 유림, 고내상면 수성리 일부를 합해 송대리(광산구 송대동)라 하고 방하동면 마현, 구용, 신용, 내동, 봉확, 학동, 신촌, 난산과 계촌면 농막을 합해 용두리라 했다. 이 면의 중심동네이며 지금의 서창동은 방하동면 원촌, 중촌, 발산, 난산, 창촌, 사동과 선도면세동, 고내상면 수성일부를 합한 법정동 이름이다. 그러므로 당시 서창면은 구한말의 방하동면, 선도면, 당부면과 계촌면, 고내상면 동각면의 일부를 합해 오늘날 서구청 면적의 절반에 가까웠다. 1914년 일본총독부가 정한 동네이름은 오늘날 동(洞)으로 바뀐 법정동네 이름으로 일본식민통치자들의 지적정리때 이용되어 오늘날 모든 토지지번은 이때 새로만든 법정리(法定里)이름으로 나온다.
배의 정박을 도왔던 농선비가 서창동 파출소 앞에 오랜세월 자리하고 있다.


1935년 광주군 광주읍이 광주부(府)가 되면서 중심부 19㎢를 제외한 광주군땅은 광산군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광산군 서창면이 되었다가 광복후인 1955년 7월 광산군 서방면, 효지면, 극락면, 석곡면이 광주시에 편입되고 이해 11월 광산군 서창면, 대촌면, 지산면은 광주시로 편입되었다. 이때 서창면의 이름은 없어지고 서창동, 세하동, 풍암동, 금호동, 마륵동, 벽진동, 매월동, 용두동의 8개동으로 쪼개졌다. 이 때문에 시 중심에 가까운 풍암동과 금호동 일대는 아파트가 빌딩 숲을 이뤄 별천지가 되고 이곳사람들은 몇몇 토박이 외에는 서창면 이라하면 영산강변의 서창동쯤으로 생각할 뿐 60여년전까지도 서창면이었던 역사를 모르고 산다.

서창면이 8개동으로 분동되어 광주시에 편입되던 해 12월 광주시는 서창동에 출장소를 개설해 금호, 풍암, 매월동을 합해 방하동(芳菏洞)이라 이름지어 서창출장소 관할하에 두었고 마륵, 벽진, 세하동을 합해 서호동(瑞湖洞)이라 하고, 서창과 용두를 합해 신호동(新湖洞)이란 이름으로 동행정을 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낯선 동네이름이다.

서창출장소는 5년만인 62년 11월 다시 광산군으로 옮겼다가 1973년 광주시가 서구를 신설했을때도 광산군에 속해 있었다. 광산군 서창출장소가 광주시에 다시 들어 온것은 송정시와 광산군이 광주직할시에 편입된 1988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광주 중앙공원과 체육공원이 있는 풍암동 일대가 광주시가 된것은 26년전인 엊그제 일이다.



금호동은 당부면

조선시대 당부면(當夫面)은 1914년 오늘날 마륵동과 금호, 풍암동의 3개동이 되었다. 1909년 이곳 인구는 422호980명이었으나 오늘날 이곳 인구는 4만여호 11만명으로 늘어났다. 앞서 밝힌바와 같이 1914년 서창면이 새로 생긴 뒤 1957년 서창출장소가 되었고 1995년 서창동이 되었다. 당시 서창동은 오늘날의 세하, 용두, 매월, 벽진, 서창, 금호, 풍암의 8개동이 속해 있었다. 마륵동은 상무지구가 개발되면서 두차례에 걸쳐 치평동에 합해졌다. 금호와 풍암은 2001년 금호풍암동이라 하여 서창동에서 분리되었다가 2년만인 2003년 다시 금호동과 풍암동으로 분리되어 90여년전의 옛이름을 세 번째로 되찾았다. 금호동은 1914년 전에는 없었던 땅이름이다. 이 동은 다시 2년만인 2005년 1·2동으로 분동해 행정동을 삼았다. 금호동은 1957년 서창출장소 방하동(芳荷洞)이라 한일이 있으나 1988년 다시 금호동으로 분리, 서창출장소 관할동이 되었으므로 이곳 동연혁을 정리하려면 헷갈리게 되어있다. 1992년 필자가 '광주동연혁지'를 간행할 때 금호동 인구는 275호 1,147명이었다. 20년만인 2012년말 금호동 1·2동 인구는 1만7,970호 5만5,169명으로 늘어났으므로 놀랄 수 밖에 없다. 당시 금호동 서쪽 벽진동 사이 구능은 공군화약고로 민간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던 땅이고 금호동에는 금부(金府) 만호(晩湖) 심곡(心谷·심실) 망월(望月) 네동네가 있었으나 길이 포장되지도 않았던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이곳에 있는 병천사(秉天祠)나 새로 생긴 태고종계 금광사(金光寺) 절 정도가 큰 건물이었다. 당부면 시절 면 사창(社倉)이 있었던지 금부동네에 ‘창골’이란 땅이름이 있었고 심실에는 ‘밍골’‘가장골’‘동맥이’ 등 옛이름도 전해왔다. 금부에는 ‘서당터’에 일신당(日新堂)이라는 4칸집과 전주이씨들이 많이 살아 제각 삼이재와 심곡재, 광산이씨 효열각이 있다. ‘벽창골’이라 부르던 망월에는 배씨들이 200여년전에 개촌했다는 구전이 전해온다. 심실은 당시에는 숲속 깊은 골로 같은 무렵 안씨들이 들어와 살았으며 금부는 수원백씨들이 많이 살았으나 도로명 한곳에도 옛동네이름을 남기지않아 잊혀질 동네들이 되었다. 풍암과의 경계에 말발굽을 닮은 산밑동네 ‘마재’가 있었다.
광주시 서구 풍암동 아파트단지내 보존돼 오고있는 당산목


풍암동은 당부면 운리리와 풍암리를 합한 지역이다. 풍암리는 오늘날 풍암지구아파트단지에 있던 동네로 금당산 중봉(233m)과 황새봉(187.5m)이 좌청룡 우백호 형국으로 동, 남, 서로 둘러싼 분지에 있던 동네이다. 북쪽이 구능지대인 생활체육공원이 가로막아 북풍받이라 할 수 있으나 뒷산이 높아 바람이 회오리치는 입지라 공기소통이 좋지않다는 말이 있었던 곳이다. 동네는 가장 안쪽 풍암로 끝자락에 있었다. 산기슭에 몇집씩 동네를 이루고 살아 명색이 풍암 열두동네라 하여 큰동네 중심의 당산제도 지냈었다. ‘수련동’ ‘언고개’ ‘웃개들’ ‘개자테’ ‘노인재’ ‘물통골’ ‘솔묏골’ ‘서당골’ ‘진등’ ‘절터골’ 따위 땅이름이 전해온다.

구름속 동네라는 뜻의 운리리(雲裏里)는 같은 풍암지구로 부르기도하지만 금당산 황새봉으로 풍암리와 격리되어 있고 풍암 나들목에 있던 동네라 비교적 넓은 들판이 있었다. 동네이름이 운리초등학교, 운리중학교에 남아있다. 제2순환도로가 매월동과 경계를 이룬다. 풍암지구택지 개발은 91∼99년까지 사이에 이뤄져 광주 최대 도시개발사업이라 불렀고 6만2천여명의 입주를 계획했었다. 운리동네는 박광옥(朴光玉·1526∼1593)나주목사를 배출한 음성박씨 토착지이다. 호가 회재(懷齎)로 고경명장군과 의병에 참여한 인물이라 그의 호를 딴 회재로(나주경계∼백운동간 12.98km)가 생겼다. 그는 죽은 뒤 의열사(義烈祠·1604년 벽진동)에 모셨으나 1868년 홰철되었다가 1986년 복원했다. 그의 영당은 1678년에 운리동네에 세워 전해오다가 이곳 택지개발 때 옮겨 세웠다.

운리는 ‘장자고을’이라고도 했으며 의병훈련과 선비들이 쓰던 사정이 있었다. ‘한새머리’ ‘넓은통’ ‘학섬테’ ‘실억들’ ‘방석테’ ‘가마골’ 땅위 이름이 전해온다.

송정∼광주간 신작로가 생기기전 나주쪽사람들은 광산 송대동 송정나루에서 서창나루(지금은 서창교가 생겼다)를 건너 벽진거쳐 금호∼운리∼풍암노인고개를 통해 광주읍을 들어왔으므로 서창면은 광주서남부들목 길목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운리에는 금정(金亭)주막이 있었고 옹기가마도 있어서 작은 장이 서기도 했다. 지도군수 오횡묵이 쓴 '지도총쇄록'에도 나오는 주막이름이다.

운리동네에는 광복후 신흥종교인 무을교(戊乙敎)라는 교당이 생겨 김홍현(金弘玄)이 교주노릇을 했으나 뒷날 전북고창 이송면으로 교당을 옮겨 대한불교 미륵종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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