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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항진(3) : 명량→선유도→장산도
<정유년 9월16일∼10월29일(1597.10.25∼12.7)>
정유년 8월의 남도 700리 ‘이순신 길’로 떠나다
입력시간 : 2014. 11.11. 00:00


신안 어의도·영광 옥슬포구에 피란민 인산인해

명량(9월16일)→당사도(9월16일~17일)→어의도(9월17일~19일)→법성포(9월19일)→홍농(9월19일~20일)→위도(9월20일~21일)→선유도(9월21일~10월 3일)→법성포(10월3일~8일)→어의도(10월8일~9일)→전라우수영(10월9일~11일)→장산도(10월11일~29일)



지도읍 어의도에 피란선 300여척이 숨는 등 무안·신안지역은 섬마다 육지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무렵 왜적이 영광에 들어오자 바다로 피란을 떠났던 강항은 ‘간양록’에서, 괴머리猫頭(영광군 군남면 옥슬리)에 가니 몇 백 척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피란선이 몰려 있었다고 했다. 이 피란민들은 이순신에겐 전력을 보강할 절호의 기회였다.



선유도에서 6일 동안 머문 이순신 선단은 뱃머리를 돌려 다시 법성포로 돌아와 앞바다에 이틀 동안 떠 있다가 뭍에 오른다. 바로 육지에 오르지 않은 것은 법성포 일대의 적의 동태를 정탐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이순신이 법성포에 머무는 동안 전남 전역에 흩어져 주둔하던 왜적들은 순천왜교성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순신 도망쳤는가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치른 뒤 곧 바로 전라우수영 바다를 떠나 선단을 당사도(전남 신안군 암태면 당사리)로 옮겨 하룻밤을 자고 서해로 북상한다. 그렇게 급히 선단을 이동시킨데 대해 ‘날씨가 사나운데다 수군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그랬다고 했는데,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적이 밀고 올 것이 두려워 줄행랑을 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후퇴로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왜적선이 이순신을 뒤쫓고 있었다.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도 다급했던 당시 상황이 나온다.

18일(명량해전 이틀 뒤) 종형 협浹이 선전관으로 이순신에게 소속해 있다가 우수영을 떠나 우리 배 있는 곳(비로초飛露草(미상. 신안군 어느 섬으로 추정)으로 달려와, “왜적선 1천여 척이 우수영으로 밀고 올라온다. 통제사도 워낙 많은 수에 놀라 서해 바다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이렇게 밀려오는 적선을 감당할 수 없어 서해로 올라가 일단 피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에선 도망이건 후퇴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 선전관 강협은 어떻게 선단을 떠나 홀로 강항이 피란 가 있는 비로초에 나타났던 것일까.

이순신이 서해를 순항하고 다시 전라우수영에 갔을 때 우우후右虞侯(절도사를 보좌하는 무관) 이정충李廷忠이 찾아왔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그가 명량해전 때 몸을 빼 어의도(전남 신안군 지도읍 어의리)로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강협도 격전지에서 몸을 뺐다가 강항을 만났던 듯하다.

이순신이 당사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어의도로 가니 그곳에 피란민 배 300여 척이 몰려 있었다. 배가 300척이라면 그 배를 타고 온 피란민은 수천 명에 달했을 것이다. 강항이 영광에서 섬을 찾아 피란을 떠날 때도 작은 배에 20여명이나 탔었다.

어의도는 지도읍 북쪽, 새우 명산지인 신안군 전장포 맞은편에 있는 섬이다. 이순신은 어의도에서 사흘을 머무른다.



해로통행첩 팔아 군자금 마련

어의도 뿐만이 아니라 무안·신안지역은 섬마다 육지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무렵 왜적이 영광에 들어오자 바다로 피란을 떠났던 강항은 ‘간양록’에서, 괴머리猫頭(영광군 군남면 옥슬리)에 가니 몇 백 척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피란배가 몰려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안지역에도 피란민들이 몰려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어의도 피란민들은 이순신에게 수군 전력을 보강할 절호의 기회였다. 장정들을 수군으로 징집하고, 수군에 입힐 옷과 군량을 확보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연해를 통행하는 선박으로서 통행첩이 없으면 간세姦細(적의 첩자)로 인정하고 통행을 금지한다는 영을 내리고, 통행료는 쌀을 기준으로 해서 받았다. 큰 배는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이었다. 집에 있는 재물과 곡식을 모두 싣고 바다로 나왔기 때문에 10여 일 동안에 1만여 석을 모을 수 있었다. 통행첩을 팔아 얻은 수입으로 구리와 철을 사들여 대포와 총을 만들고, 전함도 건조했다.’고 했다.
금정산에서 내려다 본 홍농읍 계마리와 앞바다. 왜적이 들어가 불태워 참담한 법성포를 뒤로 하고 인근 홍농곶으로 선단을 옮긴 이순신은, 바다 가운데에 배를 세워놓고 하룻밤(1597.9,19)을 보낸 뒤 북상을 계속한다.


‘해로통행첩’을 팔아 군자금은 어느 정도 마련했다. 수군을 재정비, 재건할 힘이 생겼다.



인가 불타고 인적 끊긴 법성포

이순신이 어의도에서 이틀 밤을 묵고 북상 중 법성포 포구에 이르니 보이는 것이 참으로 처참했다. 적들이 들어와 마을을 불태우고 짓이겨버린 것이다.

뒤돌아 선 이순신은 이날 밤을 법성포 인근 홍농(전남 영광군 홍농면 계마리) 앞바다에 떠서 보내고 북상을 계속, 위도蝟島를 거쳐 9월21일 고군산도古群山島(선유도)에 도착, 10월3일까지 머문다.

이순신은 고군산도에서 비로소 명량대첩 과정을 알리는 장계를 임금에게 올렸다. 기막힌 소식도 들었다. 아산 집이 왜적에게 분탕질당해 잿더미로 변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전라도 왜적 순천왜교성에 집결

선유도에서 6일 동안 머문 이순신 선단은 뱃머리를 돌려 다시 법성포로 돌아와 앞바다에 이틀 동안 떠 있다가 뭍에 오른다. 바로 육지에 오르지 않은 것은 법성포 일대의 적의 동태를 정탐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이순신이 뭍에 올라 이틀을 더 머무는 동안 호남 일원의 적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잇따라 들어왔다. 전남 전역에 흩어져 주둔하던 왜적들이 순천왜교성에 집결하고 있었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바다에서 왜적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가던 중에) 영산창榮山倉, 우수영을 지나 순천에 배를 대니, 놈들은 순천을 중심으로 갯가에다 덩그렇게 성을 쌓고, 부두를 지어놓았다. 성은 하늘로 솟구쳐 은하수를 가르는 듯했다’고 했다. 그날이 1597년 10월1일이다. 왜적들은 이렇게 왜성(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을 쌓아놓고, 전남 전 지역에 주둔하던 50개 부대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10월 8일은 날씨가 맑고 바람도 순했다. 이순신 선단은 법성포를 떠나 순풍을 타고 어의도에 잠시 들렀다가 우수영으로 직행했다. 우수영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왜적이 명량에서 패한 분풀이를 한 것이다.

해남 하늘이 연기로 뒤덮였다는 정탐 보고가 들어왔다. 해남에 주둔하던 적이 순천왜교성으로 가면서 불을 지른 것이다. 이순신은 우수영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떠 있으면서 정탐인 4명을 해남으로 보내 해남 정황을 자세히 살피도록 했다.
망해산에서 바라본 전라우수영성 안팎 마을. 명량해전을 치르고 바로 전라우수영을 떠난 이순신이 선유도까지 북상했다가 24일 만에 다시 돌아오니 성 안팎 인가는 모두 불타고 사람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왜적이 명량에서의 패전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의문의 섬 ‘안편도’는 신안 ‘장산도’

이순신이 전라우수영 바다를 떠나 안편도[발음]安便島[發音]에 도착한 것은 10월11일. ‘난중일기’에 ‘안편도’ 옆에 ‘발음’이 함께 적혔는데, 안편도를 발음도라고도 한다는 뜻이다.

이 안편도[발음]에 대해 그동안 학계에서는 소안도所安島(전남 완도군 소안면)로 추정했다. 섬 이름에 ‘안安’자가 들어 있고, 갯가 몽돌이 파도가 드나들 때 자갈자갈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렇게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난중일기’에 묘사된 안편도 주변 풍경을 보면 소안도는 아니다.

낮에 안편도[발음]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했다. 배에서 내려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배를 감추어둘 만한 곳을 살펴보니,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서(화원반도를 섬으로 착각한 듯) 멀리 바라볼 수 없으나,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의 월출산月出山까지 통했으며, 서쪽으로는 비금도飛禽島까지 통해 눈앞이 시원하게 트였다. ……(‘난중일기’ 정유년 10월11일 기사)

소안도에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다. 장학근은, ‘임진왜란사에서 미해결의 섬으로 남은 안편도는 장산도長山島(전남 신안군 장산면)’라고 했다. 문헌과 현지 확인으로 밝혀낸 것이다.

고려 중기까지 장산도 지명이 안편도였다고 한다. 장산도는 해남군 화원반도 건너편에 떠 있는 섬으로 울돌목에서 30여 리 거리에 있다. 고요한 밤이면 울돌목의 물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울돌목의 물울음소리,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장산도에 이르면 편안해진다고 해서 예로부터 안편도라고 했다는 것.

이순신이 장산도에 들른 것은 겨울을 날 포구를 찾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이순신은 장산도에서 19일 동안 머물다가, 겨울을 나기에는 미흡했던지 목포 앞 고하도로 가 겨울을 보내는데, 장산도에 그렇게 오래 머문 것은 그곳에서 기막힌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글·사진 이훈(언론인/‘이순신과의 동행’ 저자)

<hoonjr@hanmail.net>



<사진설명 大>법성포(2009년 촬영한 것이라 지금의 모습과 다르다). 이순신 선단이 이 법성포에서 하룻밤을 묵기 위해 찾아가 선창에 이르니 왜적이 침범해 인가를 불태우는 등 보이는 것이 처참했다. 이순신은 할 수 없이 선수를 돌려 이날 밤을 홍농 앞바다에서 보낸다.

<사진설명 中1>금정산에서 내려다 본 홍농읍 계마리와 앞바다. 왜적이 들어가 불태워 참담한 법성포를 뒤로 하고 인근 홍농곶으로 선단을 옮긴 이순신은, 바다 가운데에 배를 세워놓고 하룻밤(1597.9,19)을 보낸 뒤 북상을 계속한다.

<사진설명 中2> 망해산에서 바라본 전라우수영성 안팎 마을. 명량해전을 치르고 바로 전라우수영을 떠난 이순신이 선유도까지 북상했다가 24일 만에 다시 돌아오니 성 안팎 인가는 모두 불타고 사람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왜적이 명량에서의 패전 분풀이를 한 것이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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