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터- 맹강녀(孟姜女)와 설씨녀(薛氏女)

@무등일보 무등일보 입력 2017.11.27. 00:00

맹강녀(孟姜女)이야기는 중국에 전해오는 4대 민간 전설의 하나다.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의 주인공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莊公) 시절이다. 진의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천하에 인부 동원령을 내렸다. 제나라 여인이었던 맹강녀의 남편 범희량(范喜良)도 인부로 징용됐다. 혼인한 지 사흘만이었다. 남편이 떠나고 맹강녀는 날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시 황제의 만리장성 보다 맹강녀가 흘린 그리움의 눈물이 먼저 만리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르고 엄동설한, 겨울이 깊었다. 도저히 집에 머무를 수 없었던 맹강녀는 두툼한 솜옷을 지어 길을 나섰다.

몇날 며칠이 지나 만리장성 축조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성벽 아래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묻혔다고 했다. 원통 분통, 맹강녀는 통곡을 했다. 사흘 밤낮을 그렇게 울부짖었다. 하늘이 답했다. 만리장성 800리가 무너졌다. 맹강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헤맸다. 그러나 백골 뿐, 남편의 유골을 찾는 게 불가능했다.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마다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그 중 한 유골이 피를 빨아들였다. 남편이었다. 맹강녀는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내고 남편의 무덤 앞에서 굶어 죽었다.

맹강녀와 비견될 만한 우리 나라의 고사가 설씨녀(薛氏女) 이야기다. 설씨녀는 삼국사기 기인열전에 나온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다. 설씨녀는 경주 율리에 살았다.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효심도 지극했다. 당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창 다투던 시기라 사내라면 징발을 피할 수 없었다. 설씨녀의 늙은 아버지도 전쟁터로 나가야할 처지에 놓였다. 그 때 설씨녀를 흠모하던 사량부(沙梁部) 출신 소년 가실(嘉實)이 사랑을 고백하며 대신 가겠다고 했다. 가실이 돌아오면 혼인하기로 약조했다. 신표로 청동거울을 나눠가졌다.

하지만, 약속한 3년이 지나도 가실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씨녀의 아버지는 설씨녀를 다른 사람과 결혼시켜려했다. 설씨녀는 가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버텼다. 가실은 6년만에 알아보기 힘들 만큼 초라한 몰골로 돌아왔다. 깨진 거울을 맞춰보니 틀림없었다. 둘은 혼인을 맺고 백년해로 했다. 설씨녀 이야기는 고대 남녀의 연담(戀談)이기도 하지만, 고대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설화이기도 하다.

맹강녀와 설씨녀 이야기가 시공을 뛰어넘어 감동의 여운을 남기는 것은 목숨 걸고 지켜낸 약속의 무게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인 사랑을 담고 있지만, 그 사랑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 감탄고토 (甘呑苦吐)가 다반사인 세태다 보니, 맹강녀와 설씨녀가 새삼 그립다.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을 몇이나 볼 수 있을꼬? 이종주 논설실장 mdl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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