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허기에서 길어 올린 고백의 언어

@무등일보 무등일보 입력 2018.04.09. 00:00

소설가 이화경

그녀의 지적이면서도 발랄하고 유쾌한 글에 반해서 대중 강연 동영상을 일부러 찾아보기까지 했다. 적당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언어는 우아했다. 그녀는 현학적인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오랜 성찰 끝에 다듬어진 정확성을 띠고 있었다. 책 한 권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젊은 페미니스트가 된 그녀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대학 교수이다. 하지만 동영상 속의 그녀를 보면서 솔직히 무척이나 놀랐다. 그녀는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화면으로는 실제로 얼마나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한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을 위반하는 것만 같은 몸집의 거대함에 대해 묘한 이질감을 느꼈던 내 자신의 고루한 편견이 한동안 남아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고 있던 때에 아마존 서점에 새 책이 나왔다는 걸 알았다. 신간의 제목은 '헝거(Hunger)'였다. 영어로 된 작품이었지만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하루빨리 번역되길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녀는 마치 나의 궁금증을 눈치 챈 것처럼 생애에서 가장 무거웠던 때의 몸무게부터 밝히면서 글을 시작했다. 키 190센티미터에 241킬로그램이 나갔던, 그녀의 표현을 따르면, '어떻게 그 지경까지 되도록 내버려두었는지'에 대한 고백을 이어나갔다.

88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고백을 읽어나가기란 녹록치 않았다. 책은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결행한 뒤에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날씬한 몸을 만들어낸 성공담도 승리의 서사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녀는 무시무시하게 살을 찌웠을까? 그녀가 뒤룩뒤룩 살이 찌도록 먹고 또 먹어대고 지방 덩어리와 셀룰라이트 주머니들을 축적하면서 초고도 비만의 몸을 만들어야만 했던 고통의 원인을 읽는 순간, 충격과 슬픔으로 멍해지고 말았다.

착한 딸이자 모범생인 열두 살의 흑인 소녀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백인 소년과 그의 친구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에 그녀는 몸을 바꾸기 위해 먹기 시작했다. 소녀는 뚱뚱해지고 무거워진 몸을 가지게 되면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고,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끔찍한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가능한 멀어질 수 있으리라는 비극적인 진실을 알아버렸기에 음식을 몸에 쟁이고 가두고 삼켜댔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생존자가 된 어린 소녀 안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빈 공간을 메우고 방패막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음식이었다.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가장 사랑했던 명민하고 예민한 소녀는 숲속에서의 가학적이고 굴욕적인 성폭행에 대해 '싫어'라고 했던 자신의 거부가 철저히 무시당했던 기억을 언어화 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숲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어휘가 단 하나도 없었던 열두 살의 소녀는 성장을 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더라도 상대를 멈추게 하고 싶으면 멈추게 할 수 있는 안전 용어들'이 있으며, '여자가 싫다고 말하면 남자는 그 말을 들어야 하고 하던 짓을 멈춰야 하며', '강간을 당한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열두 살 아이를 위로해줄 방법도 보호해줄 길도 찾을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감 속에서 어른이 된 그녀는 캄캄한 침묵을 벗 삼고 음식으로 유일한 위안을 삼으며 살아냈다.

그녀는 여성을 비현실적인 이상에 구겨 넣으려 하는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이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허기의 감옥 안에서 폭식증과 거식증에 묶여 있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과 이성 사이의 불화, 감옥이자 요새가 된 몸의 진실,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 정체성을 이루는 다양하면서도 상충되는 인간 실존의 모습, 상처와 화해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고백의 언어들은 분명 허기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다.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은 상처의 흉터를 걷어내지 못하고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잔인한 세상에서 모진 세월을 겪은 우리 모두 크고 작은 흉터들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자신만 아는 상처와 끝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흉터를 통해 우리는 타인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인생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지 않던가. 심장을 펼쳐 보인 고백록을 써준 그녀 덕분에 오랜만에 내 허기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록산 게이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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