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칼럼- 월드클래스 포커게임에도 진정성은 먹힌다

@류성훈 입력 2018.05.31. 00:00

류성훈 사회부장

70년 만에 맞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사라질 뻔했다.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공포를 벗어던질 수 있는 호기를 맞았는데 비핵화·평화협정 담판 두 주역을 태운 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직전에 처했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핸들을 틀어 가까스로 위기 상황을 모면했다. 문 대통령이 지향하고 있는 '한반도 운전자론'이 빛났다. 월드클래스 포커게임에서도 순발력과 진정성이 먹힌 것이다. 짜릿했다.

지난 토요일 문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검은색 경호 차량이 아니라 은색 벤츠로 판문점으로 향했다. 수행 인력도 간소화했고, 경호 인력도 4대의 차량에 나눠 최소화했다.

한편으로는 아찔했다. 국군 통수권자가 청와대 참모 극소수에게만 알리고 최대한 은밀하게 북측 지역으로 넘어간 것은 사상 초유의 파격이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 도착하자 북한군 의장대 지휘 장교는 문 대통령에게 긴 검을 크게 휘두르는 북한식 경례를 올려붙였다. 레드카펫에 도열한 의장대 20여명은 '받들어총' 자세로 예우했다.

2차 정상회담에 앞서 통일각 백두산 그림 앞에 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소를 띤 문 대통령과 달리 굳은 표정이 역력했다. 급박하게 문 대통령에게 SOS를 요청한 복잡한 속내가 살짝 엿보였다.

두 정상은 마주 앉아 2시간 가까이 기탄없는 대화를 나눴다. 판문점 선언 이행과 한반도 비핵화 의지 등을 재차 확인했다. 특히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도 툭 터넣고 얘기했다. 그리고 두 정상은 헤어지기 직전 포옹을 했다.

그 광경이 왠지 뿌듯하고 '같은 동포끼리 그동안 왜 그렇게 지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남북은 이렇게 만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제는 서로가 필요하면 친구처럼 언제든 달려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증명했다. 경호문제도 쉽지 않을텐데, 그런 불안이나 부담을 넘어설 만큼 남과 북이 상대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5·26 판문점 회동은 서스펜스가 넘치는 명품 드라마였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동연출했다.

24일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회담 취소로 시작해 27일 남북정상회담 결과 발표까지 3박4일, 롤러코스터를 탄 한반도는 반전과 파격의 연속이었다. 트럼프는 판이 깨질 것을 감수하면서도 이기는 협상을 위해 도박에 나서는 '거래의 기술' 전략을 꺼내 들었다.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날, 청와대의 충격은 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실낱 같은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곧바로 북한과 물밑 접촉에 나섰고, 그 결과 돌파구가 마련됐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을 지렛대로 삼으려 했을 수 있다. 문 대통령은 기꺼이 북-미 협상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북한 행보에 여전한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북미정상회담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더라도 북한과 미국의 해빙모드 조성에 문 대통령이 '정직한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을 전 세계는 지켜봤다. 전 세계에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에 호평이 쏟아지고 있는 이유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즉각 화답했다. 그는 트위터에 "북한은 눈부신 잠재력이 있으며 언젠가는 경제적, 재정적으로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발 나아가 미국 행정부는 당초 계획했던 새로운 대북제재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

미국 정부 정상회담 준비팀과 CIA는 즉각 북한과 싱가포르로 날라가 6·12 회담에서 다뤄질 의제 및 의전·경호 등에 대해 조율하고 있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은 30일 미국을 방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빅딜'을 조율할 전망이다.

지구를 수천번 부술 수 있는 엄청난 핵무기를 비축하며 핵 경쟁을 벌인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감축 협상도, 미국 코앞에 위치한 쿠바가 소련의 미사일을 몰래 들여오면서 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 협상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다. 수차례 결렬 위기를 겪고 극적으로 타결됐다.

북미정상회담 역시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신뢰를 바탕으로 끈기있게 좋은 협상을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 해피엔딩이 가능하다.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미 상호 불가침, 남북미 3국간 종전선언, 평화협정, 대북 경제지원 등의 새로운 드라마가 기다린다. 이를 위해서는 김 위원장은 비핵화 의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실행으로 옮기고,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체제안전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증명해야 한다. 남과 북이 되살린 남북정상회담의 불씨가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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