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시각- 그가 떠난 지 아홉해. 다시 책장을 들추며.

@주현정 입력 2018.08.17. 00:00

주현정 통합뉴스룸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루 한 가운데에는 나와 일면식도 없는 부부의 사진이 내걸려 있었다.

잘 정돈된 정원을 배경으로 말끔한 정장차림의 중년 부부 곁에는 한껏 차려입은 나의 아버지가 긴장한 듯 꼿꼿하게 서 있었다.

국민학교(기자가 재학 중 '초등학교'가 되었다)에도 입학하기 전부터 걸려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 사진 속 주인공을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궁금해 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구태여 할머니, 어머니에게 '누구야?' 묻지도 않았던 것 같다.

호기심이 채 생기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여서 일 것이다.

1991년 서울 동교동에서 찍었다는 이 사진을 나의 아버지는 퍽 자랑스러워 하셨다. 이따금씩 나와 형제들을 곁에 앉혀놓고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들려주셨다.

그 액자가 집에 내걸린 지 30여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의 아버지는, 나는, 또 우리는 8월 이맘때면 그를 회상한다.

그가 별이 된 지 내일(18일)로 꼭 9년이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자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 '평화'·'용서'·'화합'의 아이콘이자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며 반세기 동안 한국 정치를 이끌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DJ의 외곽 청년 조직이었던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 지역 회장을 맡았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그의 발자취를 부단히도 따라다녔다. 아주 이른 새벽 일어나 차를 타고 달리기는 몇 시간, 배로 갈아타고도 한참을 더 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생가를 찾아가는 일도 당연하다는 듯 따라나서곤 했다. 집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그의 서적을 찾아 읽거나 그를 주제로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독려했던 덕에 DJ는 어린 기자에게도 매우 친숙한 '어르신'이었다.

덕분일까. 1997년 대선에서 마침내 승리한 그가 제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 2월25일,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취임식에 운 좋게 초청받아 다녀온 뒤에는 더욱 그를 좇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기억 속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2009년5월29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그는 "내 몸의 반쪽이 떨어져 나간 심정이다"며 위태로울 정도로 비탄의 눈물을 쏟아냈다.

노통의 빈자리만큼이나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노구의 몸에서 쏟아진 통곡이 더 가슴 아팠다.

그리고 채 3개월이 지나지 않은 2009년8월18일. 그 마저 별이 되어 버렸다.

하늘이 무너진 듯 정말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거리 곳곳에는 그의 정신과 철학을 계승하겠다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오랜만에 그의 자서전을 들쳐봤다.

"사람들은 나를 '인동초'라 불렀다. 그러나 그 모습은 왠지 슬프다. 처연한 아름다움, 인동초에는 눈물이 깃들어 있었다. 맞다. 지지자들이 나를 바라보며 흘린 눈물, 그 눈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었고 나는 그 강물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나 또한 많이 울었다. 그런 내가 눈물 나게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내가 저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했다. 지난 겨울이 혹독했던 만큼 내일의 봄날은 아름다워야 했다."

'대통령'이 된 DJ가 일산 자택을 나서며 했던 다짐을 끝으로 매조지 된 675페이지짜리 자서전 1권이 몇 년 전 읽었을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 낙선을 위해 당시 안기부가 주도했던 북풍 공작을 그린 영화 '공작'이 인기몰이 중이다. 자서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15대 대선 당시 북측 관련 에피소드는 단 몇 줄 설명에 불과하다) 그때 그 사건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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