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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32>6세기 마한 연맹 왕국 실체를 밝혀준, 양직공도(梁職貢圖)中
고구려·백제·신라 ·가야 이외 여러 국가 존재 확인
입력시간 : 2018. 11.27. 00:00


왜·신라·백제·고구려 사신(왕회도 그림)
필자는 여러 차례 영산 지중해 중심의 마한 왕국을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써야 함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해보이지 않는다. 남원과 순천 등 섬진강 주변에서 출토되는 일부 가야계 유물을 가지고 가야 세력이 이곳까지 진출하였다는 증거라는 주장이 빈번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을 강조하면서 현 정부의 100대 국정 과제에 포함된 가야사 조사·연구 및 정비 사업이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가야계통의 묘제가 확인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을 가야 문화와 관련지어 호남 지역에서 최초로 지난 봄 국가 사적(542호)으로 지정하는 등 관련 국정과제들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섬진강 유역을 넘어 전남·북 내륙 지역까지를 가야 영역으로 확대시켜 살피려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전북 지역의 국립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연구자는 전북 동부 지역도 가야 세력권에 편입시켜 살펴야 한다는 '전북 가야론'을 펴고 있다. 마한 역사 영역이 얼마나 위축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를테면 전북 일대가 가야사로 편입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곧, '전남 가야론' 주장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마한의 백제인가?' '백제의 마한인가?'라는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마한 중심의 한국 고대사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못한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나 전북 남원과 순창, 그리고 전남 곡성 등지에 마한 지역의 분구묘라고 할 수 있는 대형 '말(馬)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데 반해, 가야계통의 중대형 고총들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섬진강 유역에 가야계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북쪽의 내륙 지역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 동부 지역은 섬진강이 보성강과 합류하여 남해로 흐르지만 좁은 분지에 부분적으로 발달한 곡간 평지를 중심으로 작은 소국들이 형성되어 분립적인 성향이 강하다. 말하자면 그만큼 재지적 전통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영산강 유역이나 가야 등 외부 문화가 유입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토착적 요소를 바꿀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섬진강 유역의 전남 동부 지역은 4세기 무렵에 이미 마한 중심권의 4주식 주거지나 이중구연호가 파급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마한문화 전통이 그곳에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말하자면 섬진강 유역은 마한 문화를 기반으로 백제와 가야 문화가 공존하는 일종의 점이지대(漸移地帶)인 셈이다. 전남 동부 지역이 지리적으로 영산강 유역보다 가까운 탓에 가야 문화 요소가 많이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가야 문화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섬진강 일대에 보이는 가야계 흔적들은 교류의 산물이지 정치적 복속의 상징은 아닌 것이다.

남원 유곡리 고분






중국에서 가장 일찍 제작된 직공도이자 현재 중국 국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직공도는 높이 25cm, 길이 198cm로 여러 차례 표구된 비단 채색화로 전체가 아닌 일부만 남아 있다.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옆으로 접은 두루마기 그림으로 그 내용은 외국 사신이 양 황제에게 공물을 드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제기(題記)를 부가한 것이다. 제기에 양 보통(普通) 2년에 조공하러 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 21년(521) 무렵의 사실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곧, 521년부터 524년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양나라 화가 소역이 526년부터 541년까지 15년에 걸쳐 그렸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이 그림을 통해 백제와 양나라가 서로 깊은 우호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및 백제와의 교섭에 적극적이었던 양나라와 역시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던 백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 언급하였듯이, 여타 문헌에 전혀 나와 있지 않은 역사적 기록이 직공도의 '백제국사(百濟國使)' 제기의 "旁小國有①叛波②卓③多羅④前羅⑤斯羅⑥止迷⑦麻連⑧上巳文⑨下枕羅 等 附之"라는 구절이다. 우리가 여태 알고 있었던 6세기 무렵에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 이외에 여러 국가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 국가들을 살핌으로써 한국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형성되리라 믿는다. 이제껏 우리가 인식하였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위 기록을 읽으려 할 때는 기본적으로 521년 양나라에 입조하였던 백제 사신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백제의 시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위 기록은 '백제 곁에는 小國이 있고(방소국), 이들은 백제에 부용하고 있으며(附之), 소국들에는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 등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백제가 이들 주변 아홉 나라를 '방소국' 또는 '附之' 곧 '부용국'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과거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 군대를 대파하고 남으로는 마한 남부연맹의 맹주 침미다례를 공격하는 등 군사적인 힘을 과시하였을 때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불과 몇 년 후인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가 신라에게 항복하고, 곧 이어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에게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어 주변국들에게 우월의식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불안정한 백제의 처지는 경쟁국인 신라나 가야, 심지어 섬진강 以西 지역의 여러 세력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하였던 마한 남부 연맹 諸國들과도 백제가 정치적 우위를 점하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설혹 5세기말에서 6세기로 넘어가면서 동성왕, 무령왕의 왕권 강화가 일정부분 성공을 하여 국력이 정비되었다고 하더라도, 주변국을 '방소국'이라 부를 정도로 강력한 국가를 이루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음 호에서 다루려 하지만 6세기 중엽 무렵 백제의 지배력이 겨우 차령 이남을 넘어서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백제가 주변국을 '방소국'이라고 지칭하였던 것은 그들이 한반도에서 강국이라는 사실을 과시함으로써 당시 고구려, 백제 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양나라에게 백제에 대한 보다 우호적인 시각을 갖게 하려는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러한 추측은 방소국에 속한 '사라(斯羅⑤)'라고 하는 신라의 옛 국호를 백제가 사용하고 있는 데서도 살필 수 있다. 신라는 지증마립간 4년(503년) '斯羅'에서 '新羅'로 국호를 바꾸었다. '斯羅'가 토착적 명칭이고, '新羅'는 새롭게 漢化된 이름인 셈이다. 백제 사신이 양나라에 간 521년 무렵이면 이미 신라 국호가 '사라'에서 '신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斯羅'라는 국호를 굳이 사용한 것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증왕 때의 신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특히 양서 신라전에 "그 나라(신라)는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보낼 수가 없으며, 대화할 때도 백제를 통해서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신라는 스스로 양나라에 사신도 파견하지 못하였고, 백제인 통역 없이는 중국 언어를 이해하고 말할 능력이 없었다. 말하자면 백제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여 신라를 '방소국'이라고 낮게 평가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들 아홉 국가에 관한 기록이 우리 측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 측 일본서기에는 자세히 다룬 기록들이 적지 않아 실체 파악에 도움이 되고 있다. 맨 앞에 있는 반파(叛波①)에 대해서는 기문(己汶 섬진강 유역)의 땅을 둘러싸고 백제와 다투었던 '반파(伴跛)'가 분명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반파는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고령 지역에 비정되어 '가라(加羅)'라고도 불린다. 백제가 '伴跛'를 '반란의 물결'이라는 뜻을 지닌 '叛波'라고 지칭한 것은 백제와 이렇듯 맞서는 등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탁(卓②)'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탁순국(卓淳國)'이 분명하다. 위치에 대해 대구 또는 창원 지역 설이 충돌하고 있지만 어느 지역을 따르든, 가야 지역에 해당됨은 분명하다. 다음 '다라(多羅③)' 또한 일본서기에 보이는데, 현재 합천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역시 가야 영역이다. 그리고 '전라(前羅④)'는 일본서기에 있는 '안라(安羅)'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함안 곧 안라가야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방소국으로 지칭된 ①∼④의 네 나라는 모두 섬진강 이동 내지는 가야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가야 지역에는 6세기 중엽 무렵까지 여러 정치체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그런데 ⑥止迷⑦麻連⑧上巳文⑨下枕羅 등은 섬진강 이서에 있는 마한 연맹체들로 추정되고 있다. 곧 신라를 사이에 두고 섬진강 이동과 이서의 국가들을 백제는 방소국으로 나누어 배치한 셈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호에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문학박사·동신대 기초교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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