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35>498년 백제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親征) 기사 재검토(上)

입력 2018.12.25. 00:00
문주왕 代 마한 남부연맹 복속은 현실적 불가능
별자리 덮개돌(말이산 고분)

지난 주 경남 함안군에 위치한 '말이산 13호분'에서 독수리자리와 별자리 125개가 새겨진 돌덧널무덤 덮개돌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봉분 규모가 직경 40.1m, 높이 7.5m에 달하는 아라가야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천문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이미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졌던 이 고분은 이번 본격적인 조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지역에도 이처럼 발굴·조사되었다 하더라도 의미를 알지 못하여 무심코 지나쳤거나, 아직 발굴·조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마한시대의 많은 유적·유물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주 반남·영암 시종, 그리고 다시들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는 수많은 대형 고분들은 이 지역에 거대 왕국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의 대형 고분들을 단지 토착 세력가의 무덤으로 인식할 뿐, 단일 정치체를 이끌었던 왕릉으로 살피려는 데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최근 국회에서 열린 전라남도가 주관한 마한 관련 세미나에서도 AD3∼5세기 무렵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에 마한사회가 성립되었다고 하여, 기원 전후에 성립된 가야사보다 훨씬 늦게 형성되었다고 정의하였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마한에서 가야의 뿌리인 변한과 신라의 뿌리인 진한이 갈라져 나왔다"는 기록을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더구나 마한 '사회'라 하여 '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또한 이 지역의 '정치 세력'을 '독립된 왕국'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할 경우 6세기 중반까지도 '방소국'이라는 명칭으로 양직공도에 나타나 있는 마한 남부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국가를 지칭하는 '방소국' 표현도 백제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때, 당시 세력규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독립 '왕국'들이 형성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림1중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주장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전남 지역의 백제 복속 시점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필자는 앞서 양직공도 백제국사 제기 기록을 분석하여 적어도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 지역에 독자적인 마한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 지역이 백제의 영역에 들어간 시기에 대해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 대 복속되었다가 5세기에 들어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군대에게 밀리며 수세적인 입장으로 전환되자, 백제의 지배하에 있던 전남 지역의 마한의 일부 세력들이 백제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며 독자적인 발전을 하다가 백제 동성왕 20년(498)에 이르러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를테면 498년에 이르러 완전히 백제에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를 약간 수정하여 5세기 말 동성왕 대로 약 1세기 가량 늦춘 셈이라 하겠다. 물론 이 주장 또한 기본적으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일시적으로 복속되었다는 주장을 기저에 두고 있다.

이 주장은 삼국사기 동성왕 20년 조에 "8월, 탐라(耽羅)가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으므로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므로 (이에 탐라를 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한 기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보다 20여년 앞선 문주왕 2년(476)에 "탐라국이 방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의 벼슬을 제수하였다"고 기술된 삼국사기 기록이 역시 주목된다. 곧 문주왕 때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주왕 때 조공을 바치던 탐라가 이를 중단하자 동성왕 때 백제가 군사적 압력을 가했던 것이라 이제껏 이해하였던 것이다. 곧, 현재의 제주도에 해당하는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동성왕이 이를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 즉, 지금의 광주까지 내려왔다면 당연히 광주 지역은 이미 백제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 주장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언급된 기록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 있게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주왕 대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직후인데 마한 남부 연맹을 복속시켜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측근 신하에게 피살될 정도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그러한 문주왕이 마한의 한 왕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문주왕 뒤를 이은 동성왕 역시 일부에서 왕권이 강하였다고 살피고 있으나 실제는 정치적 불안정성이 노출되는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한 남부 연맹에 대해 강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주왕 2년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쳤다고 하는 기사와 동성왕 20년 무진주 원정 기사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먼저 문주왕 2년과 동성왕 20년 기사에 나와 있는 '탐라'의 위치 문제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탐라를 현재의 제주도로 비정한 이병도의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졌다. 이 주장은 369년 백제 근초고왕 때 전남 지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로부터 1세기가 훌쩍 지난 476년 조공을 바치고, 498년 다시 백제의 압력으로 조공을 바치었다면 당연히 바다 건너에 있는 제주도를 가리키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에 이르렀을 때 탐라가 이를 듣고 죄를 빌었다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탐라가 제주도를 지칭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가령, 바다 건너 탐라를 응징하기 위해 무진주에 이르렀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내륙 깊숙이 있는 무진주가 탐라 곧 제주도를 응징하는 정벌군이 출발하는 항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무진주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다시 해안으로 나가서 배를 이용하여 제주도로 군사를 파견하여만 제주도를 평정할 수 있으므로, 무진주에 군사가 도착한 사실이 바로 제주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탐라=제주도'설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결국, 동성왕 20년 조에 근거하는 한, 탐라는 무진주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인근의 지역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성왕 20년 8월조의 무진주 친정 관련 기사 말미에 '탐라는 곧 탐모라(耽羅卽耽牟羅)'라고 한 할주(割註)가 주목된다. 삼국사기에서는 할주를 처리할 때, 이전(異傳)을 취할 경우 '一曰·或云·一云·一名·一作'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 따라서 '탐라 즉 탐모라(耽牟羅)'라고 한 것으로 보아 '탐모라'가 '탐라'의 이칭이 아니라 '탐라=탐모라'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탐라'는 '탐모라'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곧, 동성왕 20년 조의 '탐라'는 '제주도'를 뜻하는 탐라가 아닌 다른 지역에 있는 '탐모라'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서 필자는 양직공도에 보이는 '하침라(下枕羅)'를 언급하며, 침미다례의 '침미'와 하침라의 '침라'가 음이 서로 통하는 것으로 볼 때, '하침라'는 침미다례 옆에 있는 소국으로 추정한 바 있다. 곧 강진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침(沈)'과 '탐(耽)'은 같이 사용되고 있는 데, '탐'이 '침'보다 古語라고 한다. 곧 '침모라' 이전 명칭이 '탐모라'인 셈이다. '하침라'와 '침모라'는 비슷한 음 구조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강진 일대로 비정하였던 '하침라'가 '탐모라'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강진 지역에 백제 시대에 '도무군(道武郡)'이 있었고 탐진현을 '동음현(冬音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무'와 '동음' 등이 '탐모라'의 '탐' 또는 '탐모'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동성왕 20년의 무진주 친정에 놀라 조공을 한 '탐모라'는 양직공도에 나오는 '하침라'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박사·동신대 기초교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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