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행의 세상읽기

인문지행의 세상읽기- 법정스님이 가져온 겨울의 단상(斷想) (상)

입력 2019.01.11. 00:00
법문은 요란스럽지 않고 듣고 나면 오래 남는다

찬바람이 내가 사는 시골의 산과 들을 휘익휘익 휘저으며 건너와 겨울의 손으로 내 맨 얼굴을 때리며 지나간다.

정신이 번쩍 들어 집에 들어와 공부방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전에 법정(法頂)스님이 입적하셨을 때 써놓았던 글을 보면서 스님과의 인연이 상기되었다.

처음 스님을 뵌 것은 지금부터 30년도 더 된 대학 재학시절 광주 홍안과에서 있었던 스님의 강연장에서였다.

그때 들었던 "삶에 최선을 다하면 죽음에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라는 말씀은 나의 생사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서 공부했다. 아마 90년대 중반 쯤 되었을 때 마침 여행오신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스님께서 파리 국립도서관인 비블리오테크 나쇼날(Biliotheque National)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신라시대 혜초스님이 중국 돈황(敦煌, 중국 발음은 돈황) 지역에서 친히 쓰신 필사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보고 싶다기에 지도 교수님께 부탁해서 자료를 직접 볼 수 있게 추천서를 써 달래서 그걸 가지고 함께 도서관에 갔다. 필사본 보물은 일반인들이 볼 수 없기 때문에 추천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갔더니 여남은 명의 도서관 직원들이 지켜본 상태에서 열람을 허락했다. 전에 어떤 캄보디아 스님이 와서 프랑스인이 가져간 자료를 보다가 자기 나라의 것이라며 가져가려고 한 사건이 있은 후 외국인이 자료 열람 시 이렇게 지켜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삼엄한 경계 속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보았다. '왕오천축국전'은 오천축, 즉 인도의 다섯 개 나라에 가서 보고 들을 바를 적은 글이기 때문에 '왕, 오천축국, 전'으로 띄어 읽어야 정확한 우리말 읽기가 된다. #그림1중앙#

'왕오천축국전'은 1899년 중국 서북부 끝에 위치한 감숙성 돈황석굴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은 기원전 2세기 경 한나라 무제 개척된 실크로드 왕래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꽃피었다. 중국은 인도와는 다르게 불교 승려들이 석굴을 파서 그 안에 거주하면서 창작한 조각과 회화로 된 소위 석굴 예술이란 것이 발달했는데 그 본격적인 시작이 바로 돈황석굴이다. 1000개의 동굴이 있었다고 해서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린다. 돈황석굴은 20세기에 중국에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발견과 더불어 중국 학술사상 가장 가치 있는 문화 발견이라고 불리는데 특히 5만권이 넘는(권은 종이 두루마기 하나를 가리킨다),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수많은 무명인이 손으로 써놓았던 고대 필사본의 발견은 학술계를 경천동지했으니, 이로부터 소위 돈황학이란 새로운 학문 분야가 탄생했다.

돈황사본은 제17굴의 벽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 당시 돈황석굴의 주지였던 왕도사(본명 왕원록王圓록)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왕도사는 그것들의 가치를 알지 못했으므로 성 정부에 제대로 알리지 않고 석굴을 다시 봉해 버렸다. 그러나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가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을 탐험하고 있었던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투루판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고대의 유물이나 보물들을 찾으려고 하는 서구인들의 각축장이었는데 19세기 말, 서역 국가들과 중국 서북부 지역에서 10세기 이후 매몰된 불교 유물들이 발견되자 외국의 고고학자들이 대거 이곳으로 밀어닥쳤다. 이러한 보물들의 상당수가 현장에서 강탈당하여 세계 각지의 박물관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약탈 과정에 대하여 Hopkirk Peter, Foreign Devils on the silk, 런던, British Museum, 1957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제일 먼저 돈황을 찾아온 외국인은 영국의 스타인(Stein)이었다.

한문을 몰랐던 스타인은 왕도사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보존 상태가 좋은 5000여권의 사본과 다수의 회화를 반출해갔다.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리오(Pelliot)가 왔는데 한문에 능통한 그는 굴 안에서 촛불을 켜고 일주일 동안 모든 사본을 열람하고는 스타인과 대조적으로 내용상 가치가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4000여권을 프랑스로 빼돌렸다. 현재 스타인이 반출한 돈황 사본은 대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고, ?리오의 것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림2왼쪽#

이것들 중에는 세계 유일본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있었다. 중국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가 7세기 인도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면,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텍스트 자료이다. 인도인들은 기록을 중시하지 않아 고대 문서 자료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토록이나 귀중한 우리나라의 자료가 외국에 있다는 사실에 개탄하면서 법정스님과 함께 '왕오천축국전'을 만져보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솔직히 그때 뵀을 때는 수도를 하는 선객(禪客)이라기보다는 글을 쓰는 문인의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나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는 스님의 몸에서 범접하기 힘든 상당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는 스님께서 강원도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수행생활 하시던 중이었다. 그때 스님은 유럽의 문화를 상징하는 파리에 한국 사찰이 하나도 없음을 안타까워하시며 불자들과 함께 절을 세우기로 선언하셨다.

지금 파리에 있는 길상사(吉祥寺)는 이렇게 법정스님의 원력이 동인이 되어 세워진 절이다.

다시 몇 년이 지나 내가 박사학위 준비에 바쁠 때 세 번째로 스님을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때는 나이가 많이 드셔서 연로하게 보이셨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기(禪氣)는 대단했다. 이렇게 나는 외국에 있었던 덕분으로 스님을 세 번 뵐 수 있었다. 스님의 법문은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하되, 듣고 나면 오래 남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매번 강의의 내용을 사전에 메모해 놓아서 일체 허튼 소리는 안하시고 진실되었다.

#그림3중앙#

법정스님은 법문이나 도(道)보다도 먼저 글을 통해 세간에 이름이 알져진 분이다. 내 대학시절 당시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은 매우 유명해서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다. 나 역시 수많은 애독자 중 하나였고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출간되었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 역시 소파 위와 벽 사이에 생긴 공간에 세워 놓고 시간이 나면 틈틈이 읽었다. 나는 이렇게 소파와 벽 사이를 작은 책꽃이 삼아 몇 권의 책을 놓아두고 읽는 습관이 있었다. '무소유'에서 시작해 '아름다운 마무리'로 끝나는 스님의 책들은 마치 당신 삶의 역정을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하다. 스님은 마지막이 될지 아시고 책을 쓰셨던 것일까. 30권에 달하는 스님 글의 소재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단히 평범한 것으로서, 산중에 사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상사다. 단어도 쉬워서 중학생 정도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읽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거대하지는 않지만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내면의 바다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느낀다.

동서양에는 불가 세계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수많은 문인들이 있다. 중국의 경우는 선적인 분위기를 시로 가장 잘 표현한 시인으로 당나라의 왕유(王維)를 꼽는다. 승려로는 한산(寒山) 스님의 선시(禪詩)를 최고로 친다. 산문에 있어서는 필자가 판단한다면 바로 소동파(蘇東坡, 본명 소식 蘇軾)이다. 소동파의 글 중에는 불교를 모르면 제대로 해석이 안 되는 문장들이 적지 않다. '적벽부(赤壁賦)'가 가장 대표적이다. 아쉽게도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번역들이 이 작품을 유가와 도가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데서 그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유가를 넘어 도가, 다시 도가를 넘어 불가의 가치관을 지향하고 있다. 지면상 한 부분만 보겠다.

"또한 천지간에 물건은 각자 주인이 있어서 내 것이 아니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안 되오. 오직 강 위의 청풍과 산간의 명월은 귀가 만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만나면 모양을 이루오. 취해도 금함이 없으며 사용해도 다함이 없으니 이것이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며,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는 바이오." #그림4오른쪽#

사물이 귀와 만났을 때 비로소 소리가 되고, 눈과 만났을 때 비로소 모양이 된다. 모든 존재는 이와 같아서 서로가 만나는 인연으로 인해 의미가 있게 되며 단독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의 세계는 무진장하기 때문에 다함이 없다.(무진장은 인도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야만 문장의 의미가 제대로 파악이 되는데 도가의 자연주의에서 해석을 멈추면 철학적 심오함이 반감된다. 장춘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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