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지음/창비/9천원
나희덕 시인이 신작 '파일명 서정시'를 내놨다.
지난 2014년 임화문학예술상 수상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여덟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은 그녀가 지난 30년간 걸어온 사랑과 생명력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모든 악이 모여서 배출되는 곳/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곳/이것이 인간인가, 되묻게 하는 곳'('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서)을 잔인하리만치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그곳은 '축생도에 속한 존재들'('나날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그 존재들은 '오늘도 우글거리다 우리로 돌아'가고 그 자리에는 '잘린 줄 모르고 여전히 날름거리는 혓바닥도 몇 있'는 곳('나날들')이다.
또한 그곳은 '절망은 길가의 돌보다 사소'해져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 곳이다.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아이들은 시키는대로 앉아 있었다'. '주황색 구명조끼를 서로 입혀주며',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공장의 유니폼이라는 것도 모르고/물로 된 감옥에서 입게 될 수의라는 것도 모르고'(난파된 교실)
그게 저 바다 밑에서만의 일이 아니라는데 세상의 불행이 있음을 시인은 갈파한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책상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 탕, 두드리는 손들,/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난파된 교실')
허나 죽음과 부재와 결핍이라는 서늘한 세계를 대면하는 일은 만만찮다.
'입안에는 말 대신 흙이 버석거리고/…/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썩어문드러지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다'('종이감옥')
이 축생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파일명 서정시') 때문이다.
표제작 '파일명 서정시'는 냉전기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감시하며 작성한 자료집('Deckname Lyrik', 파일명 서정시)을 소재로 차용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민간인 사찰에 대한 고발이다.
시인은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미처 하지 못했던 말, 그러나 해야 하는 말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파일명 서정시'는 슬픔의 힘으로 죽은 자를 불러내고, 비극을 움켜쥐고, 폭력을 직시하는 노래다. 진혼의 노래이자 저항의 노래다. 하나의 노래가 끝나고 다시 새 노래가 시작되기 전 흐르는 침묵, 이 찰나의 침묵에서 시인과 우리는 "죽어가는 존재들도/여기서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여기서는 잠시')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나희덕의 시세계는 최근작들을 통해 변모와 전환을 이루어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삶의 숱한 참혹과 어이없는 죽음들 앞에서 시인은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무엇도 말할 수 없다는 절망감 사이에서 어떤 말도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러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과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시인은 "간신히 벌린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말들"과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말들"('문턱 저편의 말')을 뱉는다. 이 비명 같은 말들은 서로 이어져 말다운 말이 되고, 다시 다른 말을 불러내 끝내 노래가 된다.
시인은 고대 인도의 탄센 설화,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사찰한 기록,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쁘리모 레비의 증언,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 끌라우디아 요사 감독의 영화, 공동체주의자 찰스 테일러 등 다른 장르의 텍스트를 재구성해낸다.
김옥경기자 okkim@srb.co.kr
- 대장간에 남아 있는 우리의 모습 "누군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쌓여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된다. 이 책의 귀함과 무게가 거기에 있다."한때 서울 을지로 7가는 대표 대장간 거리였다. 녹번동,수색, 구파발 등지에도 대장간이 많았다. 그랬던 대장간들이 1970∼80년대 급격한 산업구조 개편과 도시개발을 거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이제는 대장간이 모여 있는 곳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대장간 셋이 붙어 있는 인천 도원동이 국내에 마지막 남은 대장간 거리라 할 수 있다.도원역 부근에 있는 인일철공소, 인천철공소, 인해대장간 중 맏형 격은 1938년생 최고령 대장장이 송종화 장인이 운영하는 인일철공소다.책 '대장간 이야기'는 사라져가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장인 대장장이와 대장간의 모든 것을 담았다.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을 누빈다.역사 속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저자는 또 대장간이 우리말의 아주 오랜 곳간임에 틀림 없다고 말한다.이 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에 건넨 선물 중 휴대용 불붙이는 도구 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시를 일컬어 적었던 화금(火金)은 불을 일으키는 쇠라는 말이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는 쇳조각이 부시인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불과 쇠가 합쳐져 이뤄진 말이다.이 책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우리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세계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대장간과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대장간의 인문학적 향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드러내고자 애썼다"고 말하는 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나아가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 속을 누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장간 다섯 곳, 일본의 다네가시마 대장간 한 곳의 현장 모습을 보여준다. 인천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네 곳 등인데, 이제는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 혼자서 일한다. 젊은 누구도 대장간 일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 대장장이들이 일을 그만두면 그 대장간들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저자는 아쉬워한다.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마운 건 이때껏 대장간 현장을 지켜내온 이 땅의 나이 드신 대장장이 장인들이다. 힘에 부칠 때마다 대장간 현장을 찾아 그분들의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고는 했다.대장장이와 도구, 그리고 쇠. 대장간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가 있어야 쇠를 달구고 두들겨서 뭔가를 만들 수 있다. 원자재인 철물이 없어도 대장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나 원재료인 쇠 말고도 화로, 모루, 망치, 집게 같은 필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대장간 일은 쇠를 불에 달구는 작업이 우선이다. 화로에는 풀무가 따라붙는다. 바람이 없으면 화로에 불길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대장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성냥이다. 충청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대장간을 승냥깐이라 한다. 이 승냥이라는 말이 성냥에서 나왔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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