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36>498년 백제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親征) 기사 재검토下

입력 2019.01.15. 00:00
영역 확대 아닌 단순히 진출로 탐색 시도
476년 문주왕 때 탐모라가 방물을 바친
사실을 가지고 정치적 예속관계로 보는
기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상실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무렵 마한 연맹체의 여러 나라 가운데
무진고성 터

지난 연말 영산강 유역 마한문화권 개발사업 일환으로 발굴 조사 중인 함평 금산리 방대형 고분에서 '인물 식륜(埴輪, 하니와)'과 '동물 식륜' 조각이 출토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를 통해 고대 영산강 세력과 일본이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필자가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마한 남부 연맹세력들은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국, 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형성된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를테면 '마한 실크로드'를 통해 구축된 '영산 르네상스'를 꽃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한사가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필자는 지난 호에서 동성왕 20년 무진주 친정 당시 공부(貢賦)를 바친 '탐라'가 제주를 가리킨 '탐라'가 아닌 강진 지역을 가리키는 별도의 '탐모라'를 말하며, 그곳에 양직공도에 나오는 방소국인 '하침라'가 있었다고 살폈다.

그런데 이보다 20여 년 앞선 백제 문주왕 2년(476)에 "탐라국이 방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하여 사신에게 '은솔'의 관을 제수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이때의 탐라국도 당연히 강진 지역에 있는 '탐모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이 문주왕 때 조공을 바쳤던 강진 지역의 마한 연맹체가 조공을 끊자, 백제가 반발한 것이 동성왕 20년의 무주 친정 기록이라고 두 기록을 연결 지어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주왕 2년 기사를 정치적 복속과 관련이 있는 '조공'의 의미로 살폈던 것이다.

그러나 문주왕 2년의 기사를 다시 보면, '방물을 바치므로 문주왕이 기뻐했다'는 것으로 '방물을 보내왔다'고 쓰여 있을 뿐 '조공'이라는 표현은 없다. 동성왕 20년 기사에서 '공부(貢賦)'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과 대비되고 있다. 문주왕 2년(476) 무렵의 백제는 대외적으로는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하며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있었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문주왕은 귀족 세력에게 재위 4년도 못되어 피살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스런 상황에서 강진 지역에 있는 마한 연맹체가 정치적 상하 관계를 뜻하는 '조공'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문주왕 2년의 기사는 문맥 그대로 '방물을 보냈다'는 의미 이상은 아니라 하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립무원의 문주왕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마한 연맹체의 특정 왕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백제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해남반도의 '침미다례'나 영산지중해의 대국 '내비리국' 사이에 위치한 탐모라, 곧 '하침라'와의 교역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적지 않았을 법하다. 문주왕이 사신에게 관직까지 하사하며 기뻐했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추측은 다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1중앙#

일본서기에 "계체기 2년(508, 무령왕 8년) 12월 남해 가운데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무령왕 8년에 이르러 탐라와 처음 통교를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탐라'는 강진 지역이 아닌 제주도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강진 지역에 있는 '탐모라'로 해석한다면 이미 문주왕 2년과 동성왕 20년에 백제와 관계를 맺었다고 나와 있는 삼국사기 기록과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더욱이 '남해 가운데 있는 탐라'라 했으므로 제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무왕 2년(662) 기사에 "2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율이 항복해왔다. 탐라국은 무덕이래로 백제에 신속(臣屬)되었으므로 좌평의 관호를 주었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항복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면 탐라국이 백제에 복속된 시기가 무덕연간 곧 618∼625년 무렵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508년에 탐라가 백제와 처음 통교했다는 기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교류가 시작된 것일 뿐,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직 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미 508년에 탐라 즉, 제주가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498년 이전 곧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또는 늦어도 문주왕 때 전남 남해안 일대가 완전히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그들의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무덕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탐라가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기사를 믿을 수 없다 하여 배척하려 한다. 결국 필자처럼 이해를 하여야만 무덕 연간에 탐라가 백제에게 복속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온전히 해석된다 하겠다.

한편 탐모라의 사신이 백제의 은솔 관위를 받은 것을 가지고 탐모라가 백제의 관위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백제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종속된 탐모라가 동성왕 때 태도를 바꾸어 조공을 하지 않았던 것은 웅진 천도 이후 정치적 안정을 이룬 백제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에 백제는 탐모라에 부여했던 간접 지배를 친정을 통해 직접 지배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주왕 때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종속되었던 탐모라가 정치적 안정을 이룬 동성왕이 통제를 강화하자 오히려 반발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당시 섬진강 유역의 하동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던 백제가 전남 내륙의 마한 연맹체 깊숙이 군대를 이끌고 와 백제의 영역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설사 백번 양보하여 476년에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한다면, 521년 상황을 알려주는 양직공도 백제국사에 '하침라'라는 국명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결국 476년 문주왕 때 탐모라가 방물을 바친 사실을 가지고 정치적 예속관계로 보는 기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상실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무렵 마한 연맹체의 여러 나라 가운데 유독 탐모라와 백제의 관계가 자주 기록에 보이는 것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당시 탐모라가 처한 상황에서 살피는 것이 어떨까 한다. 침미다례 옆에 있는 소국 '탐모라'는 백제와 관계를 통해 마한 연맹체 내에서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드러내려 했지 않았나 한다. 말하자면 침미다례나 내비리국 등의 강대국 사이에 있는 '하침라' 즉 '탐모라'는 백제와 교류를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한다.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백제 또한 다른 한편으로 마한 연맹체를 흔들어 놓을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시 주변의 마한 왕국에 비해 작은 연맹국가에 불과하였지만 백제에 우호적이었던 '탐모라'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탐모라'가 당시 백제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회성에 그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탐모라와 지속적인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무진주에 왔던 것은 아닐까 한다. 백제가 군사적 시위를 하자 탐모라가 놀라 조공을 바쳤다는 삼국사기 기사는 아무래도 당시 강국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려고 하였던 백제의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백제가 처한 현실적 상황이나 양직공도에 확인되고 있는 6세기 중엽의 마한의 여러 나라, 그리고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 정치체 흔적들은 동성왕 20년의 무력 사용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동성왕의 무진주 원정 기사는 영역 확대가 아니라 단순히 진출로를 알아보기 위한 시도 내지는 시위 행위였을 따름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498년 '탐모라'지역 뿐만 아니라 무진주 지역까지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상기문', '하침라', '마련' 등이 521년 작성된 양직공도에 '방소국'으로 남아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그들은 6세기 초에 '막'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거나 그다지 복속된 지 시간이 얼마 경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의 영토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국가를 상징하는 '방소국'이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논리가 궁색해 보인다. 결국 498년에 마한이 백제에 편입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문학박사·동신대 기초교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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