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에세이- 한국영화, 여성감독들의 활약을 부탁해!

@무등일보 무등일보 입력 2019.01.24. 00:00

김채희 광주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얼마 전 영화 '말모이'를 봤다. 일제강점기, 우리말대사전을 편찬하려는 조선어학회의 이야기라는 정도의 단순한 정보만 가지고 관람했다. 1940년대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경성, 극장에서 해고된 후 아들 학비 때문에 가방을 훔치다 실패한 판수(유해진 분)와 그 가방의 주인이자 조선어학회 대표인 정환(윤계상 분), 그리고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판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용이 주는 먹먹함이 있었고 역사책에서 한두 줄 보았던 이야기를 서사로 만들어 낸 힘은 느껴졌으나 초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이 이어져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중반부 이후 이 영화에서 집중하는 말, 우리, 한사람의 열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 등이 보여주려는 감동이 익숙한 클리셰에 적합하게 어우러져 '우리말과 마음까지 모으는 이야기'라는 영화카피처럼 영화를 보고 나면 착한 마음이 몽글몽글 모아지고 잠자고 있던 역사의식을 깨우게 된다. '그래, 총 든 독립군말고도 독립을 위해 애썼던 많은 이들이 있었고 다양한 활동을 다각도로 조명해야 해' 라는 다소 상투적인 감상으로 마무리하려다 '근데 감독이 누구지?'하며 검색을 해보았고 반색했다. 시대극이었기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했었는데 '택시운전사'의 각본은 썼던 엄유나라는 여성감독의 첫 연출작이었다. 그동안 시대극을 여성감독이 연출했던 적을 내가 알기로는 못 본 것 같다. 제작자들은 대개 시대극을 비롯한 제작비가 많이 투여되는 작품을 여성감독에게 맡기는 것을 꺼려해 왔었다.

갑자기 모든 이야기가 새롭게 느껴졌다. 영화보다 영화의 뒷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엄유나 감독은 영화를 전공했고 연출부 생활을 하다가 시나리오를 전문적으로 쓰게 됐다고 한다. 10년 정도 이런 저런 시나리오를 쓰다 잘 안됐고 '택시운전사'가 성공한 후 '택시운전사'를 함께 했던 제작자와 영화 '말모이'를 찍게 됐다. '말모이' 역시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두 작품은 평범한 인물이 역사적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리고 주인공뿐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큰 틀에서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다. 감독의 세상과 사람, 역사를 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말모이'의 흥행을 두고 혹자는 그동안 침체된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세웠다고도 하고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이 만연한 요즘 우리말의 소중함을 환기시킨 영화로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없음에도 흥행에 성공한 것에 의미를 두기도 한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한국영화의 침체는 근 몇 년간 지속된 남성중심적 서사와 시선에 피로를 느낀 관객이 많아서이기도 하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암흑가, 사나이들의 의리와 배신, 야망 등 이미 너무 많이 봐온 이야기 말고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준비된 여성감독들의 이야기에 제작자들이 더 많이 눈을 돌리길 바란다.

지난해 상업영화 중 여성감독 작품은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 방수인 감독의 '덕구', 이언희 감독의 '탐정:리턴즈', 이지원 감독의 '미쓰백' 등 4편에 불과했다. 쓴맛을 봤던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작품들 사이에서 흥행에 성공한 작은 영화들이기도 하다. 올해 개봉예정작들을 살펴보니 역시나 여성감독의 작품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소재에서는 다양해지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 눈에 뛴다. 우리에게는 더 다양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즐길 권리가 있다. 올 한해 한국영화 그리고 여성감독들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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