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37>마한 남부연맹과 서동(薯童)설화上

입력 2019.01.29. 00:00
무왕 때 마한 남부연맹 세력이 백제 지배세력으로
서동설화가 담겨 있는 미륵사탑(익산, 복원 이전)

필자가 본란에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를 연재하며 그동안 우리에게 오랫동안 인식되었던 '백제의 마한'을 '마한의 백제'로 바꾸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마한사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격려를 받으며, 마한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켰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을 강조하면서 일어난 영산강 유역의 마한사 붐을 선도하였던 점도 의미 있어 보인다. 아무쪼록 필자의 노력이 잃어버린 마한사 복원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재의 특성상 주제별, 시기별로 구분하여 글을 쓰고 있지만 유기적인 연결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그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역사적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역사가의 사명감 때문에 묵묵히 원고를 채워가고 있다. 무미건조한 글을 마다하지 않고 3년째 지면을 할애하여 준 무등일보에 거듭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동안 연재 글 가운데 다시 읽어보아도 가장 애정이 가는 부분은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구다라'라는 용어가 실은 '마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힌 '마한의 용맹한 표상, 응준(鷹準)'을 다룬 주제였다. 일본 고대문화의 원형은 '백제'가 아닌 '마한'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 있는 마한'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필자는 '매'를 뜻하는 '응준(鷹準)'과 마한 남부연맹에 해당하는 영산강 유역을 연결지어 논증을 하였다. 이를테면 유이민계인 백제 건국 세력이 '사슴'을 상징한 것과 달리 마한 그것도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의 상징은 '새', 곧 '매'였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며, 다시들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응준'이라는 유물과 연결 지었던 것이다. 마한에서는 '매'를 '구지(具知)'라고 하고, 그 '구지'가 있는 '나라'에서 왔다하여 '구다라'라고 하는 표현이 일본에서 형성되었음을 밝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교육청에서 2018년 7월 펴낸 고등학고 역사 교과서에 '응준=백제의 별칭'이라 한다는 언급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말하자면 부여계통의 '남부여'를 사용한 백제 왕실과는 다른 마한 남부연맹의 역사이자 마한의 역사를 상징해주는 '응준'까지도 백제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을 광주교육청이 미처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림1중앙#

필자는 '응준'을 다룰 때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다룬 '서동설화' 얘기를 언급한 바 있다. 무왕 재위시 상대국인 신라는 신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치세 기간이었지만, 당 태종이 '女主不能' 곧 여왕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리며 조롱을 하던 때였다. 이 틈을 탄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의 서부 요충지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이 함락되어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피살될 정도로 국가 존망이 위태하던 시기였다. 이 난국을 불력(佛力)을 통해 극복하기 위해 선덕여왕은 자장스님의 건의를 받아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던 것이다. 삼국유사 황룡사 찰주본기에 9층탑과 관련이 있는 인근 아홉 나라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 이를 말한다. 이때 필자가 주목한 것은 신라가 백제를 '응유(鷹遊)'라고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응류는 '매'를 뜻하는 '응준'과 같은 의미로 백제를 '응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백제 무왕 때로 신라는 성왕 때 새로 제정된 '남부여'나 원래 국호인 '백제'를 사용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한, 그것도 마한 남부연맹을 상징하는 '응준'을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이 얼른 납득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신라가 백제를 '응류'라 불렀던 데는 필시 까닭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성왕 때 국호를 바꾸었다 하더라도 그 다음 위덕왕이 중국 북제로부터 받은 책봉에서 '남부여왕'이 아닌 '백제왕'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성왕이 전사한 후 '남부여'라는 국호가 사실상 폐기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삼국유사에 '남부여(南扶餘)·전백제(前百濟)·북부여(北扶餘)'라고 하여 백제의 역사를 일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후대까지도 '남부여'가 '백제'를 대신한 새로운 국호로 인식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높아 이 주장을 그냥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쩌면 7세기 전반 무렵 신라가 백제를 '응준'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이미 백제와 마한의 통합이 이루어진 무왕 때에 마한 남부연맹 세력으로 백제의 지배세력이 바꾸어져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다시피 무왕은 의자왕의 父로, 무려 42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백제는 성왕이 신라 진흥왕 군대와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싸우다 전사한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성왕을 이은 위덕왕은 4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에 있었지만, 그 뒤의 혜왕과 법왕은 불과 2년 만에 죽는 등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혜왕을 삼국사기에는 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법왕은 삼국사기에는 혜왕의 장자라고 하였지만, 수서 동이전 백제 조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등 기록에 혼선이 보인다. 이러한 특이 사항을 우연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말하자면 혜왕과 법왕의 출계의 혼선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 세력 간의 치열한 알력 다툼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왕이 즉위하였던 것이다. 무왕은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와 있으나, 그의 출계에 대해서는 이설(異說)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서동설화에 나오는 마를 파는 마동이 무왕이라는 설명이다. 원문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왕<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니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障)이다.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태어났으며, 어릴 때 서동이라 하였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이름 하였다."

우선 무왕의 출계가 이처럼 한미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비록 삼국사기에 법왕의 아들로 나와 있지만, 실제는 한미한 몰락 왕족의 후예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말하자면 성왕 전사 이후 크게 동요한 백제 왕권은 혜왕, 법왕을 거치며 주도권이 이미 귀족들에게 넘어갔던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족들은 그들이 제어하기 쉬운 인물을 왕으로 옹립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어진다. 무왕=마동 설화는 이러한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삼국유사의 '기이'편 무왕 대를 다룬 내용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인 '김부대왕' 조에 이어 나오는 ⓐ'남부여, 前百濟, 북부여', ⓑ'무왕', ⓒ'후백제, 견훤', 그리고 '가락국기' 순서의 가운데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가락국기는, 일연 스님이 후대의 기록을 추가한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것이기는 하지만 백제와 후백제, 가야의 건국 설화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은 건국 신화와 관련된 항목 사이에 '무왕'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을 일연 스님이 배치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무왕 조에 실려 있는 서동설화가 단순한 설화가 아닌 백제나 후백제의 건국 신화처럼 신화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곧 서동설화에 나오는 무왕 탄생 설화는 또 다른 건국 신화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 믿어진다. 문학박사·동신대 기초교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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