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 역사는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입력 2023.07.23. 14:32 수정 2023.07.23. 19:04 댓글 0개
정지아 아침시평 소설가

지난해 봄, 텔레비전을 없앴다. 비슷한 마음으로 뉴스를 끊은 친구들이 많다. 내 친구들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전국 강연을 다니다 보면 이 끔찍한 시절을 어떻게 견뎌야 하느냐, 이 불화의 시대에 어떻게 화해를 모색할 수 있느냐고 묻는 독자들이 많다. 소설가 나부랭이가 화해의 방법을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고민 끝에 질문한 분들에게 되묻는다. 불화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느냐고.

조선시대에는 몇 해가 머다고 당쟁이 벌어져 삼족이 멸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거나,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낯선 이국으로 떠나는 사람도 허다했다. 채 백 년도 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다. 해방 뒤라고 달랐을까? 제주 4·3이나 여순항쟁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술자리에서 대통령 욕을 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죽이 되도록 맞았다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벌어진 게 불과 반세기 전이다. 무고한 젊은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선고를 내리고, 19시간에 사형을 집행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도 그 무렵이다. 군사정권을 등에 업고 전가보도의 칼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는 간첩 혐의로 잡혀간 한 남자의 아내에게 흥분제를 먹이는, 인두겁을 쓰고는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기야 고문으로 사람을 죽이고는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해명이랍시고 버젓이 기사로 내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시대는 불화하니 참고 견디자는 말이 아니다. 불화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기본값으로 설정된 것, 그러니 낙담하지 말자는 의미다. 민주화를 위해 청춘을 불살랐던 5060 세대 중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세상은 왜 달라지지 않는 것인지, 오늘의 현실을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달라지지 않았을 뿐.

작년에 출간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물론 빨치산보다 아버지에 더 방점이 간 소설이고, 이데올로기보다 인간을 우선한 소설이긴 하지만 이 소설에는 수도 없이 빨갱이, 빨치산이란 말이 등장한다. 한때는 누가 들을까 무서워 입 밖에도 내지 못했던 말이다. 서울대 심리학과를 나온 한 선생은 프랑스 유학을 간 첫날 꿈에 그리던 세느강변의 카페에 갔다. 거리에는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세느강에 불빛이 흔들리고, 낭만에 도취하려는 찰나 옆자리에서 꼬뮤니즘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 순간 선배는 용수철처럼 벌떡 튀어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커피를 채 마시지도 못한 채. 걷다가 문득 여기는 프랑스이고 프랑스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지켜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산당, 공산주의라는 말에 얼마나 공포가 컸으면 공산당이 실재하는 나라에서 그 말이 무서워, 혹 거기 엮일까 두려워 도망쳤을까?

그랬던 나라에서 빨갱이라는 말이 숱하게 나오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란다. 판매금지 서적이 아니고! 그뿐인가. 경상도 몇 개 도시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구의 올해의 책이라는 말을 듣고는 의아했다. 곧 깨닫기는 했다. 시장님께서 올해의 책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이 없으신 덕일 테지. 어쨌거나 답답한 시절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는 사람이 많고, 그중에는 MZ 세대도 있다. 그들에게는 우리 세대와 같은 레드 콤플렉스가 없다. MZ 세대의 열린 마음이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한 요인이었다. 생각해보니 젊은 세대는 5060 세대가 열어젖힌 민주화된 세상에서 성장했다. 바꿔말하면 MZ 세대의 열린 마음은 5060 세대가 청춘을 걸고 민주화를 이뤄낸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더디지만 우리는 조금 더 열린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 앞 세대의 목숨을 건 투쟁 덕분에, 참다가 참다가 끝내는 거리로 달려나온 우리 모두 덕분에,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새로운 세대 덕분에. 이것이 인간의 일이 되어가는 방식이다. 정지아(소설가)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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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수다 출산율 높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8시간전 4877 가정이 주는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끼기 어려워진 사회가 된듯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혼자 살기도 팍팍하다보니, SNS에서 본인 과시도 늘어가고 남과 비교하며 자존감도 많이 낮아졌나봐요. 꼭 물질적인 충족이 되지 않더라도,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신뢰, 정 등이 높은 가치를 갖고 인정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봐요.
17시간전 남자직원 육아휴직 남자도 육아휴직 눈치 안보고 쓸 수 있으면, 출산율 자동으로 오름 둘중 하나는 애 봐야되는데 엄마 육휴 끝나면 그 이후엔 누가 키움???
16시간전 눈치챙겨 라떼들 시절엔 와이프가 독박육아 버텨주니까 매일 회식에 야근도 때리고 한거지. 요즘은 맞벌이가 기본인데 남직원 육휴 쓴다고 눈치주는 거 아니라 생각함
15시간전 답없음 동거가 주류가되고 육아휴직하면 시스템으로 보호해주는직장이 5%미만인데 누가 애를키우려할까 결혼도 안하는데. 답은 결혼이민밖에없고 시내의 구주택 고쳐서 신혼집으로 주면됨.재개발 이런거하지말고
14시간전 kjg8 구관이 명관이다 70년대 80년대처럼 베이비부머가 생기도록 남자와 여자가 담당하는 일을 명확하게 하도록 사회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비정규직도 없애고 평생고용직장을 정례화 하는 것이다
재밌수다 참여하기